뉴욕에 위치한 카네기홀은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공연장이다. 1891년 개관한 이후로 수많은 클래식 연주가들이 이 곳에서 데뷔 했고 전세계의 유명인사들이 연설과 강연을 하였다. 1921년 1월 26일 이 곳 카네기홀에서는 다소 특별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이 날의 행사는 여느 때와 같은 클래식 공연이 아닌 한 영화의 시사회로 진행 되었던 것이다. 해당 영화의 상영 시간은 그 당시로서는 장편인 68분에 달했다. 영화의 감독이자 주연 배우는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32살의 ‘찰리 채플린’이었는데 그는 음악까지 담당하며 다재다능 함을 마음껏 뽐냈다. 영화가 상영되자 사람들은 스크린에서 시선을 때지 못했으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을 때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또한 많은 관객들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이렇게 영화 ‘키드’의 시사회는 대성공이었으며 이후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주요 언론에도 대서특필 되었다. 주인공이자 감독이었던 찰리 채플린이라는 이름이 ‘시대의 전설’로서 비상하는 순간이었다.
찰리 채플린은 1889년 4월에 영국 런던 남부의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클럽에서의 공연을 통해 근근이 살아가는 가수 및 배우였는데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과 어머니의 방황으로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결국 부부는 별거에 들어가게 되는데 별다른 생계 수단이 없었던 어머니는 정신병원을 전전했고 채플린 형제는 10세도 안 되는 나이에 빈민 구재원에 위탁 되었다. 지독히도 불우하고 우울한 날들의 연속이었지만 어린 채플린은 상황에 위축되지 않았고 남들 앞에서 다양한 것을 표현하고 연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무대체질로서 자식의 재능을 인식한 채플린의 아버지는 1898년에 아들을 지인의 아동 극단에 소개하게 되었고 채플린은 점차 실력을 인정 받으며 그 만의 존재감을 보여주게 된다. 소년 배우로서 희극계에서 이름을 알리게 된 채플린은 17세인 1906년에 당대 영국 최고 희극단인 ‘카르노 극단’에 입단했고 1910년에는 극단의 미국 순회 공연에도 핵심 멤버로서 참여한다. 미국에 매료된 그는 이 곳에서 더욱 경력을 쌓기로 결심했고 잔류한다. 구대륙에서의 비참한 과거를 뒤로하고 신대륙에서 비상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채플린은 미국에 온 후 영화로 활동 폭을 넓혔고 여러 희극 작품에도 출연하게 되는데 대중을 웃기기는 잘 했지만 아직 자신 만의 이미지나 캐릭터를 확립하지 못한 어정쩡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1914년 2월에 ‘베니스에서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라는 7분짜리 영화를 찍게 되는데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는 ‘떠돌이 (The tramp)’ 컨셉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즉흥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작은 모자에 꽉 끼는 재킷, 통 넓은 바지에 큰 구두 그`리고 구부러진 지팡이에 콧수염까지 붙이고 팔자 걸음을 걷는 등 매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서로 어울리지 않고 상당히 어색한 복장과 걸음걸이였지만 이러한 부조화는 곧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게 된다. 이후 ‘떠돌이 컨셉’으로 20~30분 내외의 수많은 단편 영화들을 찍었는데 말이 필요 없던 무성 영화 시대에 미국을 넘어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순식간에 희극 배우로서 채플린의 주가가 수직상승하기 시작했다. 그의 엄청난 인기에 힘입어 훗날 디즈니의 만화 캐릭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떠돌이 캐릭터’를 딴 상품들이 만들어졌고 전세계에서 불티나게 팔리게 되었다. 이 당시 가장무도회의 단골 분장은 단연 채플린의 떠돌이 컨셉이었다.
채플린의 인기가 올라갈수록 그는 영화의 스토리나 제작에 본인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어필하게 되었는데 결국 그가 감독, 제작, 주연 및 음악까지 맡는 영화를 선보이게 된다. 이렇게 탄생한 가장 대표적 작품이 바로 1921년에 나온 ‘키드’였다. 영화는 한 가난한 여성이 부잣집 자동차에 갓난 아기를 버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기가 부유한 환경에서 잘 살기를 바라며 바구니에 “아이를 잘 부탁한다”는 메모를 남긴 여성의 바램과는 반대로 아기는 자동차를 훔친 도둑들에 의해 가난한 변두리 뒷골목에 버려진다. 우연히 바구니와 아기를 발견한 유리창 수리공 채플린은 이 고아를 차마 내치지 못하고 자신의 허름한 단칸 방에서 키우게 된다. 5년의 세월이 흘러 채플린과 아이는 아이가 돌을 던져 유리를 깨면 채플린이 나타나 유리를 수리해 주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어느 날 동네 불량배와 시비가 붙은 아이는 심하게 앓기 시작하는데 진료를 한 의사는 이 과정에서 채플린이 가지고 있던 아이 엄마의 메모지를 보게 된다. 의사는 채플린이 아이의 친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즉시 경찰에 신고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채플린과 아이는 경찰에 쫓기기도 하고 빈민구제시설에 머물기도 한다. 결국 아이는 채플린과 헤어진 후 영화배우로 성공한 친모를 만나게 되고 모자는 감동의 재회를 한다. 한편 상심한 채 거리를 헤매고 있던 채플린은 경찰의 도움으로 아이의 친모 집에 가게 되고 세 사람의 만남을 끝으로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된다.
키드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장편이었는데 채플린 특유의 희극과 비극적인 요소들이 잘 어우러진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영화였다. 평론가들은 영화를 보기 위해 한 손에는 손수건을 준비해야 한다고 얘기했으며 많은 관객들의 공감을 얻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키드의 아역 주인공인 ‘재키 쿠건’은 불과 6살의 나이로 헐리웃 최초의 아역 스타로서 우뚝 서게 된다. 무엇보다도 다재 다능했던 채플린은 키드를 통해 그저 잘 웃기는 유명한 광대에서 인간의 희로애락을 감동적으로 엮어낸 위대한 예술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 영화에 대한 재평가는 후세에 다시 한번 이루어지게 되는데 2011년 미국 의회도서관에 의해 문화, 역사적, 심미적으로 보관 가치 있는 위대한 작품으로 선정 된 것이다.
평생 약자의 삶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였던 채플린에게 ‘키드’는 훗날 만들게 될 ‘모던타임즈’나 ‘시티라이트’와 같은 인간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는 작품들의 시발점이 되었다. 빈민촌 건물 계단에서 채플린과 아이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영화의 스틸컷을 보면 당시 빈자들의 세상에 대한 분노, 증오, 체념 등의 다양한 감정이 섞인 처절한 외침이 들리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