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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Sep 26. 2022

1922년,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

20세기 100장의 사진 (1)

검은셔츠단원들과 함께 로마에 입성한 무솔리니

로마는 유럽의 많은 도시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멋지고 낭만적인 곳 이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중세 및 르네상스를 거치며 완성된 수많은 유적과 건물들이 전세계에서 찾아 온 관광객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하지만 1922년 10월 28일의 로마는 낭만과는 사뭇 거리가 먼 모습이었는데 도시 전체가 폭력과 대결의 기운으로 일촉즉발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험악한 분위기의 중심에는 3만 명의 사내들이 있었고 이들은 회갈색 승마 바지에 검은색 셔츠를 입고 대오를 지어 거리를 행진 하였다. 이들은 진보 성향 이었던 당시 총리 ‘루이지 팍타’의 퇴진을 요구 했는데 이중 몇 명은 총기를 휴대하고 있었고 가슴에는 잡다한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거리의 시민들 중에는 이들의 행진에 환호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 무리 중 세련된 정장을 차려 입은 한 중년의 남자가 유독 눈에 띄었다. 그는 시종일관 웃음기 없는 얼굴에 다소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마치 가부장적인 제스처를 통해 그의 권위를 보여주려 애쓰는 듯 했다. 이 남자의 이름은 ‘베니토 무솔리니’였는데 이제 검은 셔츠 무리들의 우두머리에서 이태리라는 국가의 지도자로 부상하려 하고 있었다.


1차대전이 끝난 후의 이태리는 승전국이었지만 엄청난 사회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승전국으로서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얻은 것이 거의 없었고 사회 곳곳에는 혁명을 노리는 급진 좌익과 이들을 견제하려는 우익의 대결이 표면화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1919년 이후 공업 시설이 많은 이태리 북부와 농업이 주였던 남부에서는 각각 노동자와 농민들이 주축이 되어 줄기차게 파업과 데모가 이어 졌다. 노동자와 농민의 거센 저항에 위기를 느낀 지주나 산업자본가들은 자신들의 무력함을 절감하고 외부의 정치 세력과 손을 잡으려 한다. 이러한 우익 정치 세력의 중심에는 소위 ‘파시즘’ 운동을 신봉하는 제대 군인 중심의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의 리더가 바로 베니토 무솔리니였다.


무솔리니는 1883년 7월 이태리 북부의 로마냐 (현재의 에밀리아 로마냐)주의 포를리 지방에서 태어났다. 대장장이였던 아버지는 열렬한 사회주의자로서 장남인 아들의 이름을 ‘베니토’로 지었는데 이는 멕시코의 사회주의자이며 대통령이었던 ‘베니토 후아레스’에서 따온 것이다. 어려서부터 상당한 다혈질인데다 지고 못사는 성격이었던 ‘베니토’는 기숙학교에서 동료를 폭행하고 선생님들과도 마찰을 빚어 전학 당하게 된다. 불미스러운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학한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마쳤고 교사 자격도 얻게 된다. 졸업 후인 1902년 무솔리니는 스위스로 가게 되는데 이는 사실상 징병에 대한 도피성 이주였다. 스위스 내 제네바, 베른 등을 전전하던 그는 로잔에서 대학에 입학하여 사회과학을 공부한다. 또한, 이 시기에 다양한 이태리 사회주의자들을 만나게 되는데 점차 이들과 행동을 같이했고 적극적인 활동가로 나서게 된다. 1904년에 이태리로 귀국한 그는 병역의무를 이행하기로 결심하고 철모의 깃털로 유명한 정예 ‘베르사글리에리 부대’에 입대한다. 병역을 마친 무솔리니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영토였던 트리엔트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지속하게 되고 그의 글재주를 활용하여 다양한 글을 기고한다. 이후 이태리 사회당 기관지인 ‘아반티 (Avanti : 전진)’의 편집장이 되었고 확고한 사회주의자로서 이태리 전역에 명성을 높여간다.


1914년 1차대전이 터지자 이태리 사회당은 이 전쟁을 제국주의 국가들의 대결로 규정하고 반대 입장을 당론으로 정했다. 무솔리니는 초기에는 전쟁 반대라는 당론을 따랐으나 참전을 통해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반사회주의 국가이자 반이태리 국가’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나름의 신념과 민족주의 의식을 가지고 자원 입대하게 된다. (초기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입대를 거부당한다.) 그는 입대를 통해 사회주의와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는데 이후 급격한 노선 변경을 꾀하게 된다. 1915년 9월 2차 ‘이손초 전투’에 참가한 그는 용맹을 인정받아 진급하게 되었고 유산탄 파편에 의한 부상으로 1917년 8월에 제대할 때까지 최전선을 지켰다. 제대한 그에게 사회주의는 그저 실패한 공상 속의 이론으로 여겨졌고 여전히 계속되는 사회주의자들과의 갈등을 통해 이들과 맞설 힘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그는 1919년 3월에 200명의 멤버로 ‘이태리 파쇼 전투단’을 창설하게 되고 좌익과의 본격적인 대결에 나서게 된다.


파시즘은 정의하는 것이 상당히 애매한 정치 신념으로 그 어원은 고대 로마 집정관의 호위병들이 들고 다니던 속간 (Fasces : 자작나무 다발에 도끼를 낀 형태)에서 유래한 것이다. 속간은 실질적인 무기로서의 기능 보다는 로마공화정에 대한 상징으로 부착되었던 장식물이었다. 파시즘은 나무다발 속간이 상징하듯 전체를 통한 ‘집단의 단결’을 우선시한다. 집단 중 최고는 국가로서 국가의 성공을 통해 개인의 행복도 달성 될 수 있는 것이고 동시에 국가를 위해서라면 개인의 권리도 제한 될 수 있다는 것이 그 주장의 요체로 볼 수 있다. 무솔리니는 자신의 정치 집단인 국가파시스트당을 결성 하면서 영광스러운 고대 로마의 상징물을 차용했고 자신만의 정치 이론들을 하나, 둘 정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더불어 당원들에게 검은 셔츠로 복장을 통일시켜 대외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게 된다. 검은 셔츠의 파시스트들은 1920년대 초에 이태리 전국의 좌익 세력들과 힘의 대결을 펼쳤는데 폭력은 기본이고 사로잡은 적에게 피마자 기름을 먹이는 등의 잔인한 테러를 가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경찰은 상황을 방관하거나 파시스트 편을 들었다.


1921년 5월 벌어진 이태리 총선에서 무솔리니의 국가파시스트당은 35석을 얻으며 의회 진출에 성공한다. 이후 더욱 세를 키운 국가파시스트당은 1921년 말까지 30만 명 이상의 당원을 확보하며 정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성장한다. 이러한 상황에 위기 의식을 느낀 사회주의자들의 대응도 활발해 지는데 1922년 8월에는 반파시스트의 목소리를 높이는 전국적 파업이 발생하게 된다. 이때 무솔리니는 “정부가 파업을 제지하지 않으면 파시스트당이 법과 질서의 집행자로서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곧 제노아, 안코나 등의 도시에서 파시스트들에 의한 반사회주의 테러가 발생했고 곧 이태리 전역으로 확산된다. 심지어 밀라노에서는 파시스트들이 사회주의 지방 자치정부 마저 해산시켜 버린다. 로마의 중앙정부는 일련의 사태에 경악했지만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거의 손을 놓고 있었다. 위기 의식을 가졌던 총리 ‘루이지 팍타’는 11월 초에 반파시스트 데모를 준비하려 했고 이를 눈치 챈 무솔리니는 10월 28일에 발 빠르게 선제 행동을 개시하여 수도 로마로 진군을 결정했다.


무솔리니의 진군에 깜짝 놀란 총리는 국왕인 ‘엠마누엘레 3세’에게 비상 사태 선포를 요청 했지만 국왕은 전면적인 내전을 우려하여 거부했다. 이 즈음에는 전국의 파시스트 조직들이 이태리 주요 도시 대부분을 점령한 상태였다. 다음 날인 10월 29일 엠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에게 총리직을 제안한다. 이후 사태는 아무런 유혈 충돌 없이 막을 내리게 되고 무솔리니는 최연소 총리로서 합법적으로 권력을 이양 받게 된다. 모든 것이 신속하고 조용하게 끝났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 날의 행진은 이태리 역사에서 가장 강압적이었던 20년 ‘철권 통치’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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