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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Sep 29. 2022

1923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슈퍼인플레이션

20세기 100장의 사진 (1)

독일 주부가 무가치해진 마르크화 지폐를 태우는 장면

1922년 말부터 독일 사회 전역에서 다소 이상한 풍경들이 목격되었다. 사람들이 수레나 가방에 다량의 종이뭉치를 싣고 이동하는 사례들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종이뭉치의 정체는 바로 자랑스러운 ‘도이치 마르크화’ 지폐였는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은행이나 관공서 소속의 특수 인원들이 아니란 점이었다. 이들은 평범한 일반 독일인들이었으며 많은 이들이 은행 예금의 대부분을 인출 하려 했다. 또한 이들은 그 뭉칫돈을 가지고 이것저것 구매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는데 놀라운 사실은 그 물건들이란 것들이 일반 식료품이나 생필품 같은 기본적인 물품들이었다는 점이다. 1923년이 되자 기본적인 생필품을 사기 위해 뭉칫돈을 들고 다니는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당시 물가는 도저히 당국이 통제 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는데, 1923년 1월에 ‘250 마르크’였던 빵 한 조각 가격이 11개월 후에는 무려 ‘8억배’에 달하는 ‘2천억 마르크’가 되었던 것이다. 도대체 당시 독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1차 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은 독일이라는 벌거벗겨진 전리품을 최대한 수탈하려 했다. 이러한 공식적인 수탈은 ‘전후 문제 해결’이라는 겉으로는 그럴듯한 단어 뒤에 가려져 있었고 1919년 6월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명문화 되었다. 조약의 결정에 따라 독일은 모든 해외식민지를 상실 했을 뿐만 아니라 연합국에게 천문학적인 금액을 배상해야 했던 것이다. 조약의 내용을 들은 독일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 했으며 분노에 치를 떨어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독일인들에게 분노를 야기했던 것은 전쟁배상금의 규모였는데 무려 ‘$330억’ (오늘날의 ‘$4,400억’ 이상)에 달하는 상상도 못했던 금액이었다. 특히, 1871년 보불 전쟁에 대한 패배를 통해 독일에 깊은 원한을 가지게 되었던 프랑스가 배상 요구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은 전쟁배상금으로 인해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첫 배상금은 1921년 중반에 상환 되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독일 마르크화는 대략 달러 당 90마르크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8월 이후가 되자 독일 정부는 배상금으로 인해 외화가 부족해지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마르크화 가치는 점점 더 약세가 되었다. 1922년 중반에는 달러당 330 마르크까지 하락 했는데 독일 정부의 대안이라는 것이 고작 지폐를 더 찍어 달러를 사는 것이었고 이것이 마르크화 가치 하락을 부채질했다. 결국 1922년 11월이 되자 독일은 더 이상 배상금 지불을 할 수가 없었고 12월에 환율은 달러 당 7,400 마르크까지 급격히 떨어졌다.


배상금 지급이 중단되자 최대의 숙적이었던 프랑스는 독일이 돈을 갚을 여력이 있는데도 의도적으로 상환을 미루는 것으로 판단했고 즉각 이웃 벨기에와 함께 행동을 개시한다. 1923년 1월 프랑스와 벨기에군은 독일 산업의 심장부인 ‘루르 지역’을 점령했고 산업설비와 원재료들을 압류하려 했다. 이것은 전 독일적인 항의를 낳게 되었고 독일 정부 역시 현지 노동자들에게 소극적인 사보타주를 요청했다. 프랑스군은 태업에 동참한 노동자들을 체포하고 일부는 사살하기까지 했는데 독일 정부는 다시 한번 돈을 찍어내어 태업 노동자들의 월급 지급 및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시중에는 가치가 떨어진 마르크화 지폐가 넘쳐나기 시작했고 독일 경제는 낭떠러지에서 수직낙하 하고 있었다.


마르크화 가치 하락에 더불어 물가 또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기 시작했다. 과거의 여느 인플레처럼 몇 배 오르는 것이 아니라 하루 사이에 수십 배에서 수백 배가 오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전 독일국민의 저축이 휴지조각이 되기 시작했다. 아침에 먹었던 식사 값이 점심과 저녁에 몇 배가 올라 있었다. 더 이상 마르크화는 어떠한 교환 가치도 가지지 못했고 하반기에 이르러서는 돈을 찍어내는 잉크 비용보다도 돈의 가치가 떨어졌다. 아이들은 지폐로 종이를 접거나 연을 만들었고 주부들은 집안의 난방이나 취사를 위해 돈을 태우거나 벽지 대용으로 사용했다. 술주정뱅이가 먹고 버린 술병들이 동 무게의 지폐보다 가치가 있었다는 전설적인 ‘블랙 유머’가 나온 것이 이때 즈음이었다. 성실하게 저축을 한 사람들과 연금 생활자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1923년 말이 되자 달러 당 마르크화는 ‘4조 2천억’ 수준이 되어 화폐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독일 정부는 경악하게 되었지만 지폐에 숫자 ‘0’만 추가하여 찍어 낼 뿐 다른 조치를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23년 8월에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이 수상에 취임했다. 그는 경제를 살리기 위한 몇 가지 긴급 조치를 취했는데 우선 루르 지방 노동자들의 태업을 중단 시켰고 이들의 노동력을 생산으로 집중시켰다. 다음으로 연합국과의 배상 협상을 별도로 재개했는데 이러한 행위만으로도 대내외 시장에 상당히 긍정적인 시그널을 주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했던 것이 11월에 당시 제국금융통화위원 이었던 ‘얄마르 샤흐트’를 통해 ‘렌텐마르크’라는 신규 화폐를 발행한 것이었다. 렌텐마르크는 독일의 토지에 기반하여 발행하였고 총 유통금액을 32억 렌텐마르크 수준으로 제한 하였기에 희소성이 있었다. 1렌텐마르크는 기존의 마르크 지폐 1조와 동일한 가치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렌텐마르크 도입 이후 하늘을 뚫고 치솟던 인플레가 잡히기 시작했다.


이후 독일 경제는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고 베르사유 조약이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것에 인식을 같이한 연합국에 의해 부채 탕감 협상이 시작 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었고 독일인들의 연합국에 대한 증오는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을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베르사유 조약 자문단’으로 참석했던 ‘존 메이나드 케인즈’가 가장 적절히 요약했다. 그는 연합국의 가혹한 요구와 조치가 필연적으로 또 다른 대결과 전쟁을 불러 올 것이라 생각했고 불행히도 그의 예언은 20년도 되지 않아 적중하게 된다. 이미 모든 재앙의 씨앗이 서서히 뿌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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