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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Oct 02. 2022

1924년, 파보 누르미의 신화

20세기 100장의 사진 (1)

1924년 파리올림픽 1,500 미터 결승에서 1등으로 들어오는 파보 누르미

1924년 7월의 파리는 최고 섭씨 45도에 달했던 기록적인 무더위로 인해 온 시민들이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무더위도 당시 진행 중이었던 파리 올림픽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을 꺾을 수 는 없었는데 특히 꼴롱베의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리는 육상 경기는 최고 인기 종목이었다. 수많은 관중들은 엄청난 폭염을 피하기 위해 연신 파나마 모자와 부채를 흔들어 댔지만 선수들이 레이싱을 할 때 마다 뜨겁게 응원하며 경기를 즐겼다. 7월 10일에는 여러 육상 트랙 경기들의 결승이 열렸는데 특히, 이날의 이목은 짧은 금발에 호리호리한 체구를 가진 한 선수에게 집중이 되었다. 그는 유니폼에 청색과 백색의 대조가 선명한 핀란드 국기를 달고 있었으며 압도적인 기량을 뽐내며 1,500 미터에서 우승했다. 그리고 불과 두 시간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이전의 바로 그 선수가 다시 5,000 미터 결승에 도전한 것이었다. 이전 레이스에서 회복 할 시간도 충분치 않았을 그 선수는 5,000미터에서 다시 우승하며 관중석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1924년 파리에서 ‘파보 누르미’의 신화가 쓰여지고 있었다.

          

파보 누르미는 1897년 6월 핀란드 남부의 도시인 투르쿠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핀란드는 제정 러시아의 지배 하에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목수 생활을 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나갔다. 고향 투르쿠에는 다른 핀란드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숲과 호수가 있었고 어린 누르미에게 이러한 주변 환경은 자연에서 신체를 단련 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부여해 주었다. 인근의 호수까지 수 킬로미터를 달린 후 다시 수영을 하고 겨울에는 스키를 탔던 유년 시절을 통해 그는 기초 체력을 한껏 배양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그는 11살의 나이에 1,500미터를 5분 초반대에 주파하는 엄청난 기량을 보여주었다.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1

3살의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는 장남으로서 가족을 부양해야 했고 동네 제과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운동에 대한 열정은 멈출 수 없었는지 가게의 수레들을 끌며 꾸준히 몸을 단련했다.


이러한 누르미에게 하나의 우상이 된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같은 핀란드인으로서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 중장거리에서 3개의 금메달을 딴 ‘한네스 콜레마니엔’이었다. 당시 제정 러시아의 지배에 있던 핀란드인들에게 콜레마니엔의 올림픽 우승은 비록 러시아 국기를 달고 이뤄낸 결과였지만 엄청난 민족적 쾌거였다. 이후 1차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거치면서 핀란드는 공화국으로서 독립하게 되었는데 누르미는 군에 입대하여 신생조국의 방위에 참여하였다. 그는 곧 체력이 좋고 육상을 잘하는 병사로서 상당히 유명세를 탔는데 특히 그의 상관들이 그의 이러한 실력을 인정해 주었다. 그를 비롯한 몇몇 병사들에게 별도의 육상 연습 기회가 부여 되었고 유년기 이후 접어 두었던 육상 선수에 대한 꿈이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1920년 벨기에 ‘앤트워프 올림픽’에 핀란드는 최초로 자국 국기를 앞세우고 참가하게 된다. 이미 3천미터에서 핀란드 신기록을 달성한 누르미는 육상 중장거리 대표로 선발되어 올림픽에 참여하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 최초의 경기는 5,000미터였는데 프랑스 선수에 뒤져 아쉽게 2위로 들어오게 되었다. 사실 처음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로서 이것만도 대단한 기록이지만 이 불굴의 핀란드인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이후 벌어진 10,000미터에서 누르미는 2위와의 차이를 거의 1분 이상 벌리면서 우승하였고 크로스컨트리 개인 및 단체전 마저 우승하며 3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신생 핀란드 국민들은 누르미를 비롯한 선수들의 활약에 엄청나게 열광하는데 육상에서만 9개의 금메달을 따낸 핀란드는 종합 4위라는 경이적인 성적을 거두며 신생 조국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게 된다. 금메달 중에 특히 감동적이었던 것은 바로 누르미의 우상이었던 한네스 콜레마니엔이었는데 그는 드디어 핀란드 국기를 달고 마라톤에 참가해서 우승했던 것이다.


조국에 돌아온 누르미는 핀란드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언론에는 그의 이름이 도배 되었으며 그의 고향 집에는 핀란드는 물론 전 유럽에서 쇄도하는 팬레터로 가득 차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안주하거나 만족 할 누르미가 아니었다. 이 과묵하고 차분한 사나이는 이미 조용히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1924년 파리올림픽이었다. 누르미는 그 과정에서 1921년에는 10,000미터 그리고 1922년에는 무려 2,000미터, 3,000미터, 5,000미터 에서 세계신기록을 달성한다. 이듬 해인 1923년에는 1,500미터 마저 정복하게 되는데 파리올림픽 이전에 그는 중장거리 거의 전 부문에서 세계신기록을 보유 중이었다. 더불어 함께 뛰면서 경쟁 할 ‘빌리 리톨라’ 같은 훌륭한 동료들을 통해 상호 격려와 자극을 주며 최상의 실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에게 ‘날으는 핀란드인들’ (Flying Finn) 이라 불리던 핀란드 중장거리 육상선수들의 황금기가 도래하고 있었다.


1924년 7월 5일 마침내 파리올림픽이 시작 되었고 누르미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며 1,500미터와 5,000미터에서 하루에 두 개의 금메달을 거머쥐는 신화를 쓰고 있었다. 이후에 벌어진 크로스컨트리는 40도 이상의 날씨를 견디며 달려야 했는데 인간의 한계를 테스트하는 시험장이었다. 38명의 참가자 중 무려 23명이 중도 탈락하는 극악의 레이스가 펼쳐졌다. 트랙에 들어온 선수들 중에는 결승선 위치를 모른 체 정신을 못 차리거나 완주 후 들것에 실려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차분한 핀란드 사나이는 미동의 표정 변화도 없이 또 다시 1등으로 결승선을 들어오며 개인 및 단체에서 2개 금메달을 따내고 말았다. 이후 참가한 3,000미터 계주에서 핀란드팀은 누르미의 월등한 실력을 바탕으로 우승했고 누르미는 파리 대회에서 총 5개의 금메달을 따게 되었다. 역대 올림픽에서 아직 누르미 만큼 많은 금메달을 딴 개인은 없었다. 불과 27세의 나이에 그는 살아있는 신화로 등극한 것이다.


누르미는 4년 후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파리 대회 때는 불참했던 10,000미터에서 우승하며 역대 통산 9개의 금메달을 조국 핀란드에 바친다. 그는 20세기 전반에 핀란드는 물론 세계인들의 영웅이었고 ‘파보 누르미’란 이름만으로도 중장거리 육상 자체를 의미했다. 자기 관리에 철저했던 그는 이러한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공부했으며 사업가로서도 성공했다. 더불어 무엇보다도 조국을 사랑했던 그에게 조국에 봉사 할 최고의 영예가 기다리고 있었다. 1952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제 15회 올림픽에서 최종 성화주자로서 참석한 것이다. 누르미와 함께 불을 밝힌 것은 그의 우상이었던 '한네스 콜레마니엔'이었다. 한 세대를 풍미했던 ‘날으는 핀란드인들’의 멋진 피날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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