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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Oct 24. 2022

1925년, 원숭이 재판

20세기 100장의 사진 (1)

변론 중인 클레런스 대로우

1925년 7월 미국 테네시주의 소도시인 데이튼은 평소와 다르게 수많은 외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외지인들의 상당수는 기자들이었는데 이들은 당시 데이튼에서 벌어진 한 재판을 취재하기 위해 몰려든 것이었다.  이 재판은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 시켰는데 재판 자체가 최초로 라디오를 통해 중계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보를 통해 해외로도 타전 되었다. 재판의 대상은 ‘존 스콥스’라는 평범한 고등학교 생물 담당 선생이었는데 그는 테네시주 연방 주법에 반하는 교과 내용을 가르친 것으로 기소된 것이었다. 더불어 이 재판이 주목을 받은 것에는 검찰 측과 변호인이 모두 상당한 유명인사라는 점이었다. 검찰 측인 ‘읠리엄 브라이언’은 미국 국무장관 출신으로 대통령 후보에 세번이나 출마한 정치인이었다. 한편 피고의 변호인은 ‘클레런스 대로우’라는 변호사였는데 여러 살인 사건의 변호로 당대에 가장 유명했던 인물이었다. 도대체 왜 이들은 데이튼 같은 남부 소도시의 재판장에서 맞붙게 된 것일까?


미국 남부의 ‘테네시주’는 여타 남부 지역들처럼 보수적인 성향이 상당히 강한 곳이었다. 1925년 3월 당시 테네시주 하원의원이었던 ‘존 버틀러’는 법안 하나를 발의하게 된다. 일명 ‘버틀러 법안’ 이라고 불리게 된 이 법안은 학교의 교과 내용과 관련되는 것이었는데 진화론과 관련된 내용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 버틀러는 ‘세계 기독교 근본주의 협회’의 수장으로서 성경 말씀에 충실한 원칙주의자였다. 그는 학교에서의 진화론 교육을 통해 여러 학생들이 ‘성경이 허구의 내용’이라고 믿게 된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고 무엇인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테네시주 내 여러 기독교인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결국 ‘오스틴 프레이’ 주지사의 서명을 통해 법제화되었다. 사실 프레이 주지사는 보수적인 지지층의 환심을 사기위해 서명했을 뿐이었고 이 법안이 실제로 적용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버틀러 법안의 입법은 즉시 미국 내 진보적 단체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는데 이들은 해당 법안을 개인의 자유에 대한 하나의 선전포고로 간주했다. 여러 단체들 중 설립 5년 차인 ‘미국시민자유연맹 (ACLU)’은 좀 더 적극적인 행보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버틀러 법안에 반해 기소되는 교사에 대해 재판 비용을 전액 부담하기로 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테네시주의 한 고등학교 과학 교사가 버틀러 법안을 자발적으로 위반할 의사를 밝히게 되었다. 존 스콥스 (John Scopes)라 불리는 이 교사는 주 내 소도시인 데이튼의 ‘레아카운티 고등학교’에서 과학, 생물 및 미식축구를 가르쳤다. 당시 테네시주의 생물 과목 수업에는 특정 교과서를 사용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는데 그 안에 진화론이 포함되었던 것이다. 그는 사실 자신이 진화론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는지 아닌지 정확히 판단하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시민연맹의 금전 비용 지원과 소도시 데이튼을 전국적인 명소로 회자되게 하려는 지역 사업가들의 설득을 통해 기소되기로 결심한다.  단, 제3자들이 자신의 유죄를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묘한 제안이 전제되었다.


결국 스콥스는 자신의 제자들을 대상으로 본인이 진화론을 가르침으로서 법을 위반했다는 증언을 하도록 요청했다. 본인의 기억은 분명치 않았지만 어쨌든 진화론이 수록된 교과서로 수업을 하였기 때문에 이를 가르쳤다는 가정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마침내 5월 25일에 스콥스는 버틀러 법안 위반 혐의로 테네시주에 기소된다. 사건은 점점 전국적인 관심을 끌게 되는데 단순한 법 위반 재판이 아닌 기독교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자들 사이의 대결로 의미가 확대된다. 더불어 스콥스를 기소하고 변호할 인원들이 구성되는데 재판의 의미가 남다른 만큼 상당한 지명도를 가진 인사들이 포함되었다. 스콥스를 공격할 검찰 측으로는 전국무장관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장로교 신자 윌리엄 브라이언이 참여하였고 변호인 측의 대표자는 유명 변호사이자 미국시민자유연맹 회원이었던 클레런스 대로우가 나서게 되었다. 수많은 이목이 몰린 세기의 재판은 7월 10일에 데이튼의 레아카운티 형사재판소에서 시작되었다.


재판 시작 에 변호인 측은 버틀러 법안이 교사의 권리와 학문적 자유를 침해한다는 관점에서 접근하려 했으나 점차 전략을 수정하였고 진화론과 창조론이 서로 상충하지 않음을 강조하려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다양한 진화론자들 및 학자들을 증인으로 소환하려 했으나 주임 재판관인 ‘존 럴스톤’에 의해 대부분 거부되었다. 대로우는 럴스톤이 성경근본주의적이고 검찰 측의 편을 들어 심하게 편파적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한편 검찰 측인 브라이언은 진화론 자체를 비난했고 인간이 ‘원숭이의 후손’이라는 생각 자체에 대해 상당한 혐오감을 피력했다. 재판이 진행됨에 따라 분위기는 점차 과열되어갔고 이제는 법리를 떠나 양 측의 자존심 대결로 변질되어갔다. 재판의 하이라이트였던 7일 차에 대로우는 전혀 의외의 인물을 증인으로 신청했는데 그 사람은 바로 검찰 측인 브라이언이었다. 대로우는 브라이언이 성경에 대한 전문가로서 성경 관련한 질문에 꼭 필요한 증인이라고 설명했다. 대로우는 성경의 신화적 내용이나 일부 과장된 표현 등을 근거로 들며 과학적 관점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주장했다. 성경에 대한 모독성 발언에 대해 화가 난 브라이언은 자신은 이러한 자리를 전혀 피할 이유가 없으며 신앙을 통해 무신론자들과 언제든지 토론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강조했다. 이미 과열된 재판은 임계점을 넘어 버렸고 양측은 상대방이 전혀 듣지 않는 자신들만의 일방적인 주장을 지속해 가고 있을 뿐이었다.


7월 21일에 마침내 재판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스콥스는 유죄 평결을 받았고 100달러 (현재 가치로 약 1,500 달러) 벌금형에 처해졌다. 변호인인 대로우는 대부분의 증인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에서 재판의 불공정성을 제기하며 최후 변론을 포기했다. 이는 사실상 재판 결과가 보수적인 판사와 배심원들에 의해 사전에 결정되었고 이를 통해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없다는 불만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브라이언은 서면으로 제출된 최후진술에서 과학이 그 발전을 통해 미래세대에 엄청난 재앙이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재판은 끝났지만 여전히 미국 사회는 갑론을박하는 상황이었다. 검찰 측인 브라이언은 재판 과정에서 받았던 엄청난 압박과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재판 종료 5일 후에 사망하게 된다.


1925년 7월의 이 재판은 이후의 유사한 소송들의 시발점이 되었다. 미국 주류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였기에 이러한 소송들은 끊임없이 이어지게 된다. 이후에도 버틀러 법안은 한동안 유지되었고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7년에 폐지되었다. 1925년의 원숭이 재판은 인류사에 수도 없이 있었던 종교와 과학, 인간의 믿음과 이성이 상호 충돌할 때 어떤 모습으로 발현되고 전개되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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