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1월 첫 두 주 동안 미국의 많은 지역에서는 다소 생소하고 황당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1월의 차가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남성들이 주류 가게 앞에 장사진을 치며 대량의 알코올 음료를 구매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류를 판매하는 가게 앞에는 대부분 ‘마지막 재고 판매 (The last call)’ 등의 문구 등이 붙어 있었다. 주류점의 적극적인 판촉에 부응하듯이 구매자들이 구입하는 양도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섰다. 많은 이들이 큰 박스나 수레 심지어는 트럭까지 동원해서 주류를 운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이러한 진풍경은 1년 전 의회에서 통과된 법안 하나와 관련이 있었는데 이 법안은 단순히 ‘18차 헌법 수정안’으로 불리었고 1920년 1월 17일부터 효력을 가지도록 되어 있었다. 그 법은 미국 성인들의 주요 기호품인 주류의 생산, 유통 및 판매를 금지하는 것으로서 흔히 ‘금주법’이라고 불리게 된다. 당시 이 법을 제정한 의원들은 금주법이 향후 미국인들의 생활 및 문화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게 될지 짐작조차 못했을 것이다.
미국인들은 건국 이래 청교도적인 가치를 중요시 했고 이는 사회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윤리가 되었다. 청교도적 가치를 통해 많은 미국인들은 근면하고 검소한 생활을 강조하며 세상적인 타락과 방종에 대해 경계하였다. 여러 신실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 경건한 삶에 악영향을 끼치는 부정한 요소들은 터부시 되었는데 술이야말로 이러한 것들 중 대표적인 것이었다. 특히 남북전쟁 전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각종 신흥 거주지에는 많은 술집 (Saloon)들이 함께 존재했고 대게 이들 술집들은 도박이나 매춘과 같은 범죄와도 연결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대한 반발로서 ‘금주 십자군’ 같은 여러 금주 단체들이 결성되기도 했는데 이들은 대중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점차 정치적인 성격의 압력단체로서 부상하게 되었다. 더불어 많은 여성들이 금주 운동에 동참하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이는 20세기 초 여성 참정권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는 계기가 된다.
시간이 흘러 미국이 1차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좀 더 다른 이유로 알코올에 대한 제재 여론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의 분위기는 국가의 모든 역량을 전선에 집중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였는데 귀중한 곡물을 술을 만드는 데 쓰이는 것에 대해 비판이 가해졌던 것이다. 결국 이것은 의회의 입법으로 연결 되었는데 1917년 12월에 법안이 통과 되었고 1919년 1월16일에 비준 되었다. (당시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은 이에 반대했었다.) 이 때 전쟁은 이미 종결 되었지만 술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은 수그러들 줄 몰랐고 많은 미국인들이 금주를 통해 알코올 질환 및 가정 폭력을 예방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법안 비준 후 1년의 유예 기간을 거쳐 1920년 1월 17일부터 본격적인 금주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미국 전역에 1,500명 이상의 단속 요원들이 사람들의 음주 및 판매 행위를 단속하며 법 질서 집행에 나섰다. 개인의 집안 내에서의 음주는 허용 되었다.
알코올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금주법을 열렬히 환영하였지만 여전히 많은 미국인들이 술을 좋아한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금주법에는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는데 종교 의식용 와인이나 의료용으로 처방을 받은 경우였다. 애주가들은 이러한 법의 빈 틈을 노렸고 의료용 알코올 처방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금주법 시기 중 의사나 약사들은 이러한 의료용 알코올 판매를 통해 상당한 부수입을 올렸다. 또한, 포도주스를 일정 기간 놔두면 자연 발효가 되어 와인으로 변한다는 사실에서 포도주스 판매량 또한 급증하게 되었다. 해안에 사는 사람들은 음주를 위해 공해상으로 배를 타고 나가기도 했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듯이 대도시의 범죄조직들은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들은 캐나다 등 인근 국가에서 주류를 밀반입했고 국내에서도 공업용 알코올을 이용한 밀주를 제조했으며 도시 곳곳에서 비밀스럽게 판매하고 있었다. 이러한 비밀영업장은 대게 소규모 재즈밴드의 연주와 춤이 제공되는 곳이었다. 이를 통해 범죄조직들은 점차 세를 넓혔고 시카고의 ‘알 카포네’ 같은 악명 높은 갱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선한 바램과는 다르게 미국 사회는 점차 혼란스러워 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금주법에 대한 대중의 불만은 더욱 커져만 갔고 연방 정부의 근심 또한 증가하기 시작했다. 정부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주류 판매를 통한 세수가 사실상 사라진 것이 가장 큰 문제였던 것이다. (금주법 이전 연방 세수의 14%가 알코올 관련 판매에서 나왔다.) 특히 1929년의 대공황 이후에는 이러한 세수 감소의 영향이 더욱 크게 다가왔고 금주법 폐지에 대한 조직적인 반대 여론도 점차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결국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집권 시기인 1933년 3월에 3.2% 이상의 알코올 제조를 허가하는 금주법 수정안이 통과되며 사실상 폐지 된다.
금주법 시기를 거치면서 미국 사회는 다양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는데 특히 여성과 흑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조금씩 변하게 되었다. 금주법 이전에 일반 미국 여성들은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술집이나 바에 드나드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금주법 시기 동안 도시의 클럽이나 비밀영업점에 여성들의 출입이 증가했고 많은 경우에 백인 남녀 손님들은 흑인들이 연주하는 재즈를 들으면서 여흥을 즐겼다. 제한적이나마 흑백 인종 간에 교류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금주법이 끝난 후에 여성들이 동네의 선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는 풍경은 더 이상 낮 선 것이 아니었다.
금주법은 20세기에 있었던 여러 사회적 실험 중 하나였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법의 시행 결과는 아무리 선한 의지를 가지고 추진을 하더라도 인간의 계획과 바람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더불어 금주법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인위적으로 억누를 때 어떤 결과를 초래 하는지 잘 알려주는 최적의 사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