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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Jul 22. 2022

1919년, 스파르타쿠스단의 반란

20세기 100장의 사진 (1)

바리케이드 앞에서 전투 중인 스파르타쿠스단원들

1차세계대전 전후의 유럽은 전쟁의 종식을 환영하는 사람들의 기쁨과 동시에 국가 별 내전 및 혁명이 뒤 섞인 극도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 진행 중이던 러시아에서 내전 및 살상은 끝이 없을 것처럼 보였고 그 거대한 폭풍의 영향력이 중동부 유럽의 인접국들까지 위협했다. 특히, 패전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그 광풍을 정면으로 맞고 있었는데 두 나라 모두 패전에 따른 황제의 퇴위와 함께 권력의 진공 상황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러한 권력의 공백 상태는 혁명의 전파를 노리는 공산/사회주의 세력과 이를 막으려는 기존 보수 세력 간의 필연적 대결로 이어졌고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전개된다. 독일에서는 이미 1918년 11월에 북부 킬 항의 좌익계 수병들의 반란이 혁명으로 확산 되었고 결국 이것은 독일의 패전으로 이어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혁명의 불길은 다음 목표를 향해 이동 하였는데 그 곳은 바로 독일 제국의 심장이자 수도인 ‘베를린’이었다.


휴전 직후의 베를린은 혁명의 확산을 노리는 사회/공산주의자와 혼란 속에 귀향한 제대 군인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황제 빌헬름 2세의 퇴위 후에는 사민당의 지도자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를 중심으로 수립된 ‘국민대표회의’가 임시정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국민대표회의는 온건파인 사민당과 강성 좌파인 독립사민당의 연합체로 대단히 불안한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또한 더욱 극단적인 ‘스파르타쿠스단 (고대 로마의 노예 반란을 주도한 스파르타쿠스에서 이름을 따옴)’이 있었는데 이들은 사민당에서 탈퇴한 ‘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의 주도로 러시아 식의 급진적인 혁명을 원하며 사민당과 대립하였다.

이 당시 임시정부 및 요인들은 11월 혁명을 주도한 ‘인민해군부대’에 의해 경호를 받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들이 점차 강성 좌익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인민해군부대는12월 23일, 그 동안 밀린 월급의 지급을 요구하며 사민당의 군무 담당관이었던 ‘오토 벨스’를 베를린 왕궁에 감금하게 된다. 에베르트 등의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그의 석방을 위해 베를린 경찰 총수인 ‘에밀 아이히혼’에게 보안대 투입을 지시하나 강성 좌익인 독립사민당 소속이었던 아이히혼은 명령을 거부한다. 이에 에베르트는 군 부대 투입을 지시했고 소규모 전투를 통해 벨스는 석방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인민해군부대원 11명이 사망했고 독립사민당은 임시정부를 부정하며 국민대표회의를 탈퇴하게 된다. 해가 바뀐 1919년 1월 4일에 에베르트가 경찰서장 아이히혼을 경질하자 독립사민당뿐만 아니라 이미 독일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꾼 스파르타쿠스단까지 반발하게 되고 임시정부와의 갈등이 폭발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다음 날인 1월 5일, 독립사민당의 주도로 아이히혼 경질에 대한 항의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이때는 공산당도 가세하게 되는데 1월 7일에는 노동자 계급을 대상으로 대규모 파업을 주도하였고 종국에는 혁명을 통한 임시정부의 전복을 목적으로 하였다. 파업에는 50만 이라는 엄청난 수의 베를린 노동자들이 동참하였으며 이들은 곧 베를린 경찰청과 언론사 지구를 점령하였다. 좌익 시위대는 혁명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초기의 기세와 성공에 한껏 고무 되었지만 향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모른 체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었다. 공산당의 리프크네히트를 비롯한 급진파들은 강력한 무장투쟁을 주장한 반면 어떤 이들은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임시정부와의 협상을 강조 하였다. 실제로 양 측은 협상도 시도 했지만 성과 없이 결렬 되었으며 무장 대치 상태가 이어지게 된다. 그러는 동안 베를린의 중산층 시민들도 목소리를 내어 임시정부 지지 의사를 밝혔으며 임시정부는 나름대로 사태의 조속한 해결을 위한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에베르트는 1월 10일 정규군은 물론 주로 제대군인으로 구성된 ‘자유군단’에게 봉기 세력인 공산당 (스파르타쿠스단)을 진압 하도록 지시하였다. 영국, 프랑스와의 악몽 같은 참호전에서 단련된 자유군단 장교와 병사들 눈에 오합지졸인 공산당 시위대들은 처리하기 쉬운 상대로 여겨졌다. 더구나 소총 정도만 휴대한 시위대는 기관총과 박격포로 무장한 자유군단과는 화력 면에서 도저히 비교 할 대상이 아니었다. 불과 5일이 지난 1월 15일까지 좌익 시위대들은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많은 수의 즉결 처형이 이루어 졌는데 제대 군인 입장에서 이들 시위대들은 조국을 치욕적인 패배로 밀어버리며 등 뒤에서 비수를 꽂은 ‘후방의 배신자들’일 뿐이었다. 공산당 지도자인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 역시 이 광란의 학살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데 이들은 베를린의 한 호텔에 은신 중 발견되어 구타 당한 후 잔인하게 살해 되었고 슈프레강 인근의 운하에 버려지게 된다. 이들의 시신은 4개월이 지난 5월 말경에 발견되었다.


이를 전후해 독일 전역에서 유사한 시위 및 혁명이 일어나게 되고 심지어 남부 뮌헨에서는 잠시나마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이 수립되어 권력을 잡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모든 혁명 시도는 군대 및 자유군단의 개입을 통해 좌절 되었는데 이 때의 좌우 대립은 바이마르 공화국 내내 벌어질 이념 전쟁의 신호탄이자 축소판이었다. 더불어 로자 룩셈부르크나 쿠르트 아이즈너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 수상 역임)와 같은 좌익 내 유대인들이 우익 세력에 의해 부각 되어 훗날 나치가 유대인과 관련된 악의적 선전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에서 1919년 1월의 일주일간 벌어진 사건들은 다가오는 시대에 벌어질 무서운 재앙의 예고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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