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7월 18일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성당’의 한 장례식에 참석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참석했던 만큼 많은 고위층의 사람들이 모여서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 했는데 심지어 러시아 동방정교의 주교까지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도대체 고인이 어떤 사람이었길래 이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된 것일까? 놀랍게도 장례식의 주인공은 최근에 죽은 사람이 아니었다. 고인은 무려 80년 전에 사망한 사람이었는데 소련 공산주의 정권 하에서는 그의 죽음이나 과정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금기 시 되었던 인물 이었다. 장례식의 주인공은 바로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로서 흔히 ‘니콜라이 2세’로 불리는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였다. 이 날 장례식은 80년 전 같은 날 죽은 그와 황후인 그의 부인, 다섯 명의 자녀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니콜라이 2세가 죽음을 맞이한 과정은 러시아 현대사의 모든 비극이 혼합된 사건의 연속이었다.
러시아가 1차세계대전에 참전한 이후 민중들의 삶은 나날이 피폐해지고 있었다. 전반적인 전황은 러시아에게 불리했는데 동맹국과의 전투를 통해 러시아는 영토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500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916년 6월부터 시작된 회심의 ‘브루실로프 공세’는 오스트리아-헝가리를 크게 약화 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전체 전쟁의 판도를 바꾸지는 못했다. 전황이 좋지 않은 가운데 경제 상황도 악화일로였는데 우선 전비를 충당할 자금이 부족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루블화를 찍어내는 과정에서 물가 상승이 가중 되었던 것이다. 러시아 국민들은 전쟁을 혐오하게 되었고 이러한 분위기는 급기야 군대까지 확산 되었다. 1916년 말이 되자 사방에 혁명의 기운이 만연하였고 언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시기는 빠르게 다가왔다.
1917년 3월 8일 (러시아력으로 2월 23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수도 페트로그라드 內 방직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이 ‘빵을 달라’는 구호를 내걸고 시위를 벌였다. 여성 노동자들의 단순했던 시위는 전 도시로 번져갔고 진압 군경마저 이들 편에 서서 시위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는 황제가 폐위되며 300년 간의 ‘로마노프 가문’ 지배가 종식 되었고 공화국이 선포 된다. 공화국 수립에 따라 러시아 민중의 기대는 증대 되었으나 전쟁은 계속 되었고 그들의 굶주림도 여전했다. 이러한 가운데 ‘블라디미르 레닌’을 중심으로 하는 과격파 ‘볼세비키’ 세력이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레닌은 1917년 11월 6일 (러시아력 10월 24일) 혁명군을 통해 페트로그라드의 주요 시설을 장악함으로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2월 혁명 이후 니콜라이 2세는 시베리아의 토블스크에 가족과 함께 연금 되어있었는데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한 후에는 그 나마 남아있던 특별 대우들이 점차 없어지게 되었다. 황제를 시중 들던 하인들은 해산 되었으며 권위를 상징하는 예복도 입을 수 없었고 식사도 일반 병사들의 수준으로 질이 낮아졌다. 1918년 4월에는 우랄 산맥이 가까운 서쪽의 ‘예카테린부르그’의 ‘이파티예프 저택’으로 이송 되었는데 목책 담장이 쳐진 2층 집에서는 외부를 보기가 힘들었다. 한때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大러시아 제국의 황제는 일반 보초들의 엄중한 감시를 받으며 경멸과 천대를 견뎌야 했다. 보초들은 황제의 4명의 황녀들에게 외설스러운 농담을 던지고 놀리면서 자극시켰다. 하지만 황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反볼세비키 세력이 하루 빨리 와서 구해 주기 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하지만 바깥 세상의 상황은 황제의 바람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1918년 6월이 되자 ‘적백 내전’도 점차 치열해지고 있었는데 백군 (반혁명 세력) 편에 선 체코 군단 (*구오스트리아-헝가리 국적으로 전투 중 러시아군에 포로로 잡힌 체코 출신 병사들로 구성된 부대)이 점차 예카테린부르그로 접근하고 있었다. 현지의 소비에트 위원회는 황제 및 일가족을 즉시 처형하자는 메시지를 모스크바에 보냈다. 원래 황제는 재판을 통해 처형 될 것이었지만 백군에 황제가 넘어가는 날에는 혁명 전쟁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었고 따라서 즉각적인 처형만이 후환을 없애는 방법이었다. 결국 7월 초 레닌, 스베르들로프 등의 최고위급 협의에서 처형이 결정 되었다. 시기는 백군의 이동 상황을 보며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진행토록 지시 되었다.
황제의 연금을 총괄하고 있던 ‘야코프 유로프스키’는 7월 16일에 우랄 소비에트 위원회로부터 현지의 혁명군이 퇴각 중인 상황이므로 즉시 황제의 처형이 집행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이미 처형 방식 및 사체 처리 장소를 물색했던 유로프스키는 황제 및 가족 7명과 하녀, 주치의 4명 등 총 11명을 처리하기 위한 10인의 인원을 선발한다. 이들은 마우저, 브라우닝 등 다양한 권총으로 무장했는데 희생자가 바로 죽지 않은 것을 대비해 총검과 삽도 준비했다.
7월 17일 자정이 되자 유로프스키는 황제의 주치의에게 황족을 깨우라고 명령하는데 “위험한 전투 상황을 피하기 위해 즉시 타지로 이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제에게는 이들을 태울 차가 오기 전까지 잠시 건물의 지하실에서 대기하라고 얘기 했는데 이 곳이야말로 처형이 벌어질 곳이었다. 이후 유로프스키는 황제의 처형에 대한 인민위원회의 결정문을 읽게 되고 지하실에서는 대학살이 벌어진다.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총격과 사람들의 신음 소리와 고성이 뒤 섞인 가운데 한 명씩 확인 사살이 이루어졌고 구석에 있던 황녀들 중 일부는 총검에 찔려 죽어갔다. 황족들이 만약을 대비해 옷 속에 숨겨 놓았던 보석들이 일부 방탄 작용을 했지만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것이 300년 동안 러시아를 통치하던 로마노프 황족 일가의 마지막 모습 이었다.
이후 시체는 트럭에 실려 인근의 폐광에 옮겨 졌지만 쉽게 발견 될 수 있다는 우려에 15km 떨어진 숲 속에 매장하게 된다. 시체는 신원 확인을 어렵게 하기 위해 절단 후 황산이 부어지고 화장 되었다. 매장에 동원된 인원들 중 일부는 술에 취해 있었는데 황족들의 시체를 뒤져 보석을 찾으려 했고 황후의 치마를 벗기며 시체를 모욕하는 짐승같은 짓을 서슴지 않았다. 이후 7월 25일에 백군이 이파티예프 저택에 들어 왔을 때는 처형 흔적만 확인했고 끝내 시체는 발견하지 못했다. 볼세비키 정권은 대외적으로 황제의 죽음은 발표 했으나 황족은 안전한 장소에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러시아 내전이 공산주의 세력의 승리로 끝나고 소련이 수립되자 황제의 죽음에 대한 언급은 금기 시 되는 주제였다. 1979년 5월에는 소련 內 일반인들에 의해 해당 지점이 발견 되었지만 이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소련이 사실상 몰락한 1990년 이후였다.
1991년 7월, DNA 검사를 통해 살해당한 황족들의 신원이 확인 되었다. (알렉세이 황태자와 또 다른 한 명의 황녀 신원은 2007년에 밝혀졌다.) 러시아 연방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옐친은 황족의 장례식에 참석하며 “이들의 죽음이야 말로 러시아 역사의 가장 부끄러운 부분”이라고 밝혔다. 2000년 8월에 로마노프 황족 일가는 동방정교회로부터 성인으로 시성 되었다. 하지만 최고의 권력을 누리다가 나락으로 떨어진 후 참을 수 없는 굴욕을 견디며 가족과 함께 죽어간 니콜라이 2세에게 이것은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