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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May 24. 2022

1916년, 탱크의 등장

20세기 100장의 사진 (1)

탱크와 함께 공격 준비 중인 영국군

인류 역사에 있었던 수많은 전쟁의 참전자들 중1916년 9월 15일의 독일군만큼 놀라고 당황했던 군대도 없었을 것이다. 이날 아침 프랑스의 북서부 ‘플레르’와 ‘쿠르셀레트’ 지방에서 영국 및 영연방군과 대치 중이던 독일군에게 거대한 철제 물체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기묘한 위장 무늬로 도장을 한 이 육중한 물체는 시속 5km 이내의 저속으로 천천히 움직이며 전진을 했다. 난생 처음 보는 기괴한 물체의 모습에 전선의 독일군은 엄청난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된다. 곧 정신을 가다듬고 방어에 나선 독일군은 제식 무기인 마우저 소총과 맥심 기관총으로 대응해 보았지만 유령처럼 다가오는 물체의 움직임을 멈출 수 없었다. 영국군은 이날 괴물체의 도움에 힘입어 철조망과 포탄 구덩이로 가득한 무인지대를 돌파했고 일부 독일군 진지를 점령 할 수 있었다. ‘탱크’라는 신개념의 무기가 전장에 데뷔하는 순간이었다.


1914년 9월의 마른 전투 이후 연합군과 독일군 사이에는 참호로 만들어진 기나긴 전선이 고착화 되었다. 이 전선은 스위스 국경에서 멀리 영불해협까지 뻗어 있었는데 병사들은 상대방의 전선을 뚫기 위해 수많은 돌격을 감행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격이 번번이 실패 했는데 이유는 촘촘히 구축된 철조망과 수백 발의 탄알을 미친 듯이 연사 해대는 기관총 때문이었다. 특히 기관총은 병사들의 소총이 한 발 쏜 후 다시 재장전을 하며 전진해야 하는 와중에 분당 600발 가량의 탄환을 고정 진지에서 무한대로 쏟아 부었다. 이러한 기관총의 존재는 양 측의 공격을 번번이 좌절 시켰고 상호 엄청난 숫자의 희생자를 강요했다. 동시에 참호에서 공격 대기하거나 방어하던 병사들은 쥐, 썩어가는 시체 및 오물이 가득한 구덩이에서 극한의 인내를 시험하고 있었다. 연합군과 독일군 양 측 모두 이러한 지옥 같은 상황을 타개하고 싶어했고 무엇인가 강력한 돌파구가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영국군 공병대 소령이었던 ‘어니스트 스윈튼’은 1차대전 초기 프랑스 파견 연락 장교였는데 참호전의 교착 상태를 타개할 방법을 찾고 있던 많은 연합군 장교 중 하나였다. 어느 날 그는 친구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는데 그 내용은 전선의 험한 지형에서 트랙터를 이용한 수송이 유용할 것이라는 아이디어였다. 스윈튼은 친구의 제안을 전선의 정체를 타개 할 방법과 연결하여 생각하였다. 그는 무한궤도를 사용하는 트랙터를 통해 적의 방어선을 돌파 할 수 있다고 확신 하였고 이를 전쟁성에 제안한다. 하지만 그의 제안은 전쟁성 관료들에게 기각 당하게 되고 이러한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제국국방위원회장 ‘모리스 행키’가 이를 자신의 위원회에 공유한다. 이에 가장 관심을 보인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해군성 장관인 ‘윈스턴 처칠’이었는데 그는 육군이 개발하지 않는다면 해군이 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이후 처칠은 1915년 2월에 ‘육상전함 위원회’를 설치하게 되고 본격적인 ‘전선돌파 무기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새로 만들어질 이 ‘육상전함’은 철조망과 참호를 통과하기 위한 무한궤도를 달고 적을 공격하기 위해 기관총이나 야포를 장착할 계획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보병의 진군과 맞추기 위해 6km의 속도와 1.5m의 등판 능력 및 참호 폭인 2.4m를 통과 할 수 있어야 했다. 제작에는 트랙터 전문회사인 ‘윌리엄 포스터社’가 선정 되었는데 1916년 2월경에는 시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최종 완성된 제품은 30톤 이상의 중량에 6파운드 포 (57mm) 2문과 기관총 4정을 장착한 8인용 장갑무기였다. 로이드 조지 수상까지 모시고 참관한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었고 영국군은 즉시 100대를 주문한다. 무기의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공장에서 생산 시에는 중동의 사막에 보내는 물탱크라는 의미로 탱크로 불려 졌는데 이것이 그대로 굳어져서 탱크라는 이름으로 쓰이게 되었다.  이제 탱크는 프랑스로 보내졌고 실전 투입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1916년 7월 1일 영국군은 베르됭에서 독일군의 압력을 덜고 전선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프랑스 북서부에서 ‘솜 전투’를 개시한다. 하지만 사전 포격의 실패로 독일군 방어선은 큰 피해 없이 버티고 있었고 무작정 돌격한 영국군은 이날 하루만 무려 2만 명이 전사하는 영국 역사상 최대의 인명 손실을 보게 된다. 두어 달간의 악전고투가 지속되고 9월 중순이 되자 영국군은 신무기를 통해 상황을 반전 시키려 하고 있었고 마침내 9월 15일에 탱크를 기관총 부대에 배속하여 투입하기로 결정 한다. 거대한 탱크를 처음 본 독일군은 경악했고 그 심리적 충격은 대단했다. 하지만 영국군의 실상은 사뭇 달랐는데 당시 프랑스에 옮겨진 탱크 49대 중 실전에 참가한 것은 32대였고 그날 최종 목적을 이룬 것은 겨우 9대였다. 더구나 전투 전후 많은 탱크들이 기계적인 결함과 고장으로 가동이 불가능했다. 이러한 현장에서의 열악한 상황을 후방의 국민들 및 일선의 독일군들은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영국인들은 드디어 자국을 폭격하는 체펠린 비행선의 대항마가 나타났다고 환호했다. 탱크가 날로 추락해 가던 영국인들의 전쟁 사기 고양에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후 프랑스군도 탱크를 개발해서 적극적으로 투입하기 시작했고 ‘르노 FT’ 같은 모델은 최초의 회전식 포탑을 가진 선구적인 탱크로서 명성을 떨쳤다. 시간이 지나고 전장에서의 다양한 상황을 반영하여 탱크는 점차 기술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했고 전술도 차츰 가다듬어지고 있었다.  1918년 11월에 1차세계대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는데 이후 독일군은 탱크 및 중화기의 보유가 금지되고 전면적 무장해제를 당하게 된다. 이때 남게 된 소수의 독일군 장교들은 자신들을 그토록 두렵게 했던 탱크에 대한 연구를 지속 하는데 연합군의 눈을 피해 몰래 진행 해야만 했다. 이들은 와신상담하며 합판으로 만든 전차로 전술을 연구했고 자동차를 타고 훈련을 했는데 이것이 20년 후에 전세계를 놀라게 할 독일전차군단의 초라한 시작이었다.


기관총이라는 새로운 장애물을 탱크라는 대안으로 맞섰던 일련의 상황은 인류의 역사가 ‘도전과 응전’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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