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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May 16. 2022

1915년, 갈리폴리 상륙과 앤잭데이

20세기 100장의 사진 (1)

갈라폴리 전투 시 터키군 진지를 향해 총검돌격 중인 호주군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매년 4월 25일은 ‘앤잭데이 (ANZAC Day)’라 불리는 국가 전몰자 추념일이다. 이 날 켄버라, 시드니, 웰링턴 등 양국의 주요 도시에서는 수많은 군인들의 시가행진 및 전쟁 관련 전시회가 벌어진다. 앤잭데이를 통해 양국 국민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희생한 참전군인들과 상이용사들을 기리며 경건한 하루를 보낸다. 더불어 당시 군인들이 먹었던 딱딱한 ‘앤잭 비스킷’을 씹으면서 이들의 희생을 추모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날 이벤트의 절정은 호주, 뉴질랜드가 아닌 머나먼 타국의 작은 도시에서 열리는 기념행사이다. 그 곳은 바로 터키 서남부의 다다넬즈 해협에 위치한 갈리폴리 (터키명 차낙칼레/겔리불루)라는 곳인데 4월 25일의 행사는 호주, 뉴질랜드뿐만 아니라 터키에게도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신성한 의식이다. 이 모든 것의 발단은 지금으로부터 107년전의 한 사건으로부터 비롯 되었다.


1914년 7월에 1차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로 서부 전선은 기관총의 등장을 통한 참호전으로 전쟁의 양상이 바뀌었고 연합군과 독일군 사이에 지옥 같은 교착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한편, 동부 전선은 오스만 제국이 11월에 독일 편에 서면서 북쪽의 러시아를 견제 하게 되는데 오스만 제국의 두 개의 해협 (이스탄불의 보스포러스 해협과 남쪽의 다다넬즈 해협)을 통해 흑해로부터 물자의 상당량을 공급 받고 있던 러시아에게 이것은 엄청난 전략적 위협이었다. 더불어 코카서스 국경에서 오스만군이 진격해오자 러시아는 더욱 더 다급해 졌다. 이러한 상황은 러시아가 독일에게 적극적으로 맞서 서부 전선의 압력을 덜어주길 바랬던 연합군에게도 재앙이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영국은 당시 해군장관이던 윈스턴 처칠의 주도로 오스만 제국의 핵심을 직접 공격하여 단기간에 전쟁에서 이탈시킬 계획을 세웠다. 터키 서부의 다다넬즈 해협을 거쳐 당시 수도인 콘스탄티니예 (오늘날의 이스탄불)가 있는 보스포러스 해협으로 직행 한다는 매우 대담한 계획이었다. 성공만 한다면 전쟁의 흐름과 결과를 순식간에 바꿀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감이 충만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1915년 2월과 3월에 걸쳐 해군 만으로 다다넬즈 해협의 터키군 포 진지들을 공격하게 된다. 하지만 두 차례에 걸친 해상 공격 도중에 영국과 프랑스의 함선 8척이 침몰하는 최악의 패배를 겪게 된다. 당시 오스만 터키군은 소형 기뢰정을 이용하여 야밤에 기뢰를 부설 하였는데 1열 종대로 조용히 해협을 지나가던 연합군 함대들은 기뢰와 해안포로 인해 영문도 모르고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해군장관 처칠이 책임을 지고 불명예 퇴진을 하게 된다. 연합군 수뇌부는 해군 만으로는 적의 거점 점령에 역부족이며 육군의 상륙작전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본격적인 ‘갈리폴리 상륙작전’의 시작이 되었다.


갈리폴리 상륙에는 주축인 영국, 프랑스군 외에도 당시 영국의 자치령이었던 호주, 뉴질랜드 군인들이 최초로 자국의 이름으로 참전하게 된다. 이들 부대는 양국의 약자를 따서 ‘앤잭 군단’ (ANZAC: 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으로 불리게 되는데 1914년 12월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창설 되었다. 연합군이 육군 투입을 검토할 때 앤잭군단은 터키와 가까운 이집트에 주둔 중이었기 때문에 가장 우선적인 전투 투입 대상으로 고려 되었다. 현지에서 단기간 훈련을 마친 후 마침내 1915년 4월 25일 본격적인 작전에 참여하게 된다. 앤잭군단의 전설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앤잭군단은 4월 25일 새벽 4시에 상륙용 보트에 나누어 타고 갈리폴리 반도 서부의 상륙지를 향해 나아 갔는데 거친 해류에 휩쓸려 원래 계획했던 곳 보다 1km가량 북쪽에 상륙하게 된다. 이 곳은 매우 짧은 해변 바로 앞에 높은 고지대가 펼쳐지는 방어군에 절대 유리한 지형이었다. (8년 전 터키에 거주할 때 이 곳에 가 본 적이 있다. 문자 그대로 ‘급경사 절벽’이다. 당시의 앤잭 병사들의 고통스러운 감정이 절로 이입 됐다.) 훗날 ‘앤잭 해안’ (Anzac Cove)라 불리게 된 이곳에서 호주, 뉴질랜드 군은 가파른 경사와 증원된 터키군의 기관총 및 저격병에 막혀 한치도 진격 못하고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전투 첫날에만 무려 2천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더불어 전투가 진행 됨에 따라 보급에 따른 문제들이 불거지기 시작했는데 멀리 이집트에서 가져와야 하는 식수, 음식, 심지어 탄약까지 제대로 공급되는 것이 없었다. 이러한 악조건 하에서 호주, 뉴질랜드 병사들은 때로는 터키군 공격을 막아내고 때로는 해안을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돌격을 감행하기도 했지만 번번히 적군의 독일제 기관총에 진격이 막히게 되었다. 터키군도 이곳이 무너지면 조국이 끝장이라는 생각에 죽음을 각오했고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양 측은 온갖 방법을 모색했는데 총알이 떨어지면 육박전을 벌였고 심지어 돌을 던지며 싸웠다. 이러한 상황이 무려 7개월 이상 지속 되었다. 결국 연합군은 25만명이라는 막대한 희생을 내었고1916년 1월에 완전 철수하게 된다. 앤잭군단에서만 총 1만 천명 이상의 사망자와 2만 3천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양 국의 인구가 600만 명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할 때 단일 전투에서 이 정도 피해가 났다는 것은 엄청난 희생이었다. 이후 호주와 뉴질랜드는 영국의 자치령이 아닌 자신들의 국가 정체성에 눈을 띄게 되었으며 매년 4월 25일을 국가적 추념일로 지정하며 갈리폴리의 희생자들을 애도하게 된다. 앤잭 데이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2차세계대전, 한국 전쟁 및 베트남 전쟁의 희생자도 함께 애도하는 날로서 그 의미가 확대 되었다.


당시 오스만군의 유능한 지휘관이자 훗날 갈리폴리의 영웅으로서 터키의 국부가 된 ‘무스타파 케말’ (케말 파샤 또는 케말 아타튀르크)은 전쟁이 끝난 후 터키군과 앤잭군단 희생자 모두를 추모하는 헌사를 바친다. 그는 앤잭 군단을 비록 적이지만 대단히 용감한 병사들로서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대인배적인 제스처를 통해 지난 날의 적이었던 호주, 뉴질랜드, 터키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를 위로하고 애도하는 자리가 매년 4월 25일 터키 갈리폴리에서 실시되고 있다.

 1915년 갈리폴리에서 양 측은 용감한 전사로서 최선을 다해 싸웠으며 비록 병사들은 고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최고의 예우를 받으며 영원한 식을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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