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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May 07. 2022

1914년, 마른의 택시

20세기 100장의 사진 (1)

전방으로 이동중인 마른의 택시

1914년 9월 6일 늦은 오후 파리 중심에 위치한 기념박물관 ‘앵발리드 (Les Invalides)’에는 삼삼오오 자동차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 자동차들은 순식 간에 수백대로 증가 했는데 이 차들에게는 하나의 특징이 있었다. 모든 차량들이 택시였고 그 대부분은 르노의 ‘AG 타입’ 모델이었다. 저녁 10시 경이 되자 350대로 구성된 첫 번째 그룹의 택시들이25km의 저속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파리의 어둠 속에 전방 라이트를 끈 체 앞 차의 후방 라이트에만 의지해서 천천히 주행하고 있었다. 한 시간 후에는 또 다른 250대의 택시들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운전자들 중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았고 모두 침묵 속에 묵묵히 나아가고 있었다. 이들 중 누구도 이 날 자신들의 행동이 프랑스 국민들에게 깊이 각인되며 하나의 전설로 남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훗날 ‘마른의 택시’라고 불리게 된 프랑스 역사의 한 장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871년에 프랑스와 독일 제국의 전신인 프로이센 간 ‘보불 전쟁’이 끝난 후 유럽은 소위 ‘벨 에포크’ (La belle epoche)라 불리는 평화의 시대를 만끽하고 있었다. 유럽 국가들은 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고 과학 기술은 눈부시게 발달 했으며 예술 또한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 신흥 독일 제국과 기존 강대국인 영국과 프랑스와의 갈등, 게르만민족주의와 슬라브 민족주의의 충돌 등이 겹치며 거대한 전쟁의 위험한 유증기가 유럽 전체에 가득차고 있었다.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발생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 부부의 암살은 가득 찬 유증기에 불을 붙인 사건 이었다. 7월 28일 암살 사건의 처리에 불만을 품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암살범들의 조국인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세르비아의 후견인을 자처하는 러시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같은 게르만 국가인 독일이 러시아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며 전쟁은 순식간에 세계대전으로 확산 되었다.  


독일은 서쪽에 프랑스와 동쪽에 러시아라는 두 적을 상대해야 했는데 국토가 넓고 기술이 낙후한 러시아의 군대 동원이 상대적으로 늦을 것으로 판단했다. 따라서 독일의 전략은 신속하게 프랑스를 제압한 후 러시아를 상대하겠다는 것이었고 이러한 전략의 핵심이 바로 ‘슐리펜 계획’이었다. 작전을 입안한 독일군 참모총장의 이름에서 따온 슐리펜 계획은 39일 내로 신속하게 프랑스를 제압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작전의 요지는 독일군의 우익을 대폭 강화하여 프랑스군을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 파리 부근에서 대포위하고 섬멸하는데 있었다. 독일군은 8월 초 슐리펜 계획의 일환으로 중립국인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 북부를 공격했다. 8월말까지 독일군은 하루 40km가량의 엄청난 강행군을 하며 프랑스군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9월 초에 독일군은 파리 인근까지 진격했고 프랑스 수도의 함락은 시간 문제로 보였다. 하지만 상상 이상의 거리를 이동한 독일군은 극도로 지쳐 있었다. 더구나 이 중요한 순간에 독일군은 동부 전선의 러시아군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일부 사단을 이동 시켰고 병력 부족으로 인해 독일군 부대간 간극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프랑스군에게 서서히 기회가 오고 있었다. 그 장소는 독일군이 이제 막 건너기 시작한 파리 동부의 마른강이었다.


프랑스군 총사령관인 ‘조제프 조프르’는 이 시점에서 반격을 준비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후방의 병력들을 신속하고 집중적으로 마른강의 전선으로 보내는 일이었다. 파리 지역 사령관인 ‘조제프 갈리에니’ 장군은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파리 시내의 모든 택시들을 징발하기 시작했다. 전쟁 전 파리에는 1만대 가량의 택시가 운행 중이었지만 이 당시에는 고령의 기사들이 운전하는 3천대 정도가 남아있었다. 수송해야 할 병력은 6천명 가량 되었고 택시 한 대당 5명이 탐승 한다고 할 때 약 1,200대의 택시가 필요했다. 9월 6일 프랑스군은 헌병을 동원하여 택시 회사들을 수배하고 파리 중심지인 앵발리드 앞에 택시들을 집합시켰다. 많은 기사들이 파리를 지켜내겠다는 굳건한 애국심 하나로 동참한다. 물론 무료 수송은 아니었고 프랑스 정부가 해당 택시 비용을 지불해 주는 것으로 보상을 했다. 다음 날인 9월 7일에도 700대의 택시가 동원되었다. 최종적으로 9월 8일까지 1,300여대의 택시가 5천명 2개 연대의 병력을 전방 각지로 수송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하늘에 닫았는지 프랑스군은 마른강에서 무적을 자랑하던 독일군을 패퇴 시키고 파리를 지킬 수 있었다. 역사는 이를 ‘마른강의 기적’이라 부른다. 독일군의 패배와 동시에 스위스 국경에서 영불 해협으로 이어지는 악몽 같은 4년 간의 참호전이 시작 되었다.


훗날 전쟁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동원된 병력이 전체 이동병력 15만명 대비 얼마 되지 않았으며 전투에 대한 기여도 역시 그리 크지 않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전통적인 프랑스인들의 애국심이었다. 이들 전투병을 실은 택시들의 장대한 행렬은 많은 프랑스인들에 의해 목격 되었으며 순식간에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다. 이것은 조국을 지키려는 프랑스인들의 투지에 엄청난 자극이 되었으며 ‘마른의 택시’는 침략군에 굴하지 않는 프랑스 저항 의식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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