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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Apr 25. 2022

1912년, 카르파티아호의 타이타닉호 구조

20세기 100장의 사진 (1)

카르파티아호에 승선 대기 중인 타이타닉호 구명 보트

역사상 여객선 타이타닉호보다 극적인 운명을 가졌던 배도 없을 것이다. 1912년 당시 세계 최대의 여객선으로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 시키며 건조 되었지만 처녀 항해에서 빙산과 충돌하여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 바로 그 배이다. 당시 사망한 사람이 승선 인원 2,200여명 중 무려 1,496명 이었는데 이는 그때까지 발생한 어떠한 해난 사고보다도 많은 희생자 수치였다. 한편, 부족한 구명 보트에도 불구하고 705명의 사람들이 생존했는데 이것은 지금부터 얘기하고자 하는 다른 한 척의 배와 그 승무원들 덕분이었다. 그 배는 바로 ‘카르파티아호’로 영국의 여객선 회사인 ‘커나드 라인’ 소속의 13,500톤 급 선박이었다. 1912년 4월 14일 타이타닉호가 가라앉던 그 운명의 날에 카르타피아호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자.


카르타피아라는 선명은 슬로바키아와 우크라이나 등으로 이어지는 동부 유럽의 산맥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20세기 초에 대서양 횡단 여객선 사업은 극심한 경쟁 속에 있었는데 영국의 ‘커나드 라인’과 타이타닉을 보유한 ‘화이트스타 라인’ 그리고 신생 독일 제국의 ‘함부르크-아메리카 라인’ 등이 주요 경쟁사였다. 1903년 취역한 카르파티아호는 커나드 라인의 사업에 있어 핵심 여객선이었고 미국의 뉴욕과 유럽의 트리에스테, 피우메 (현재 크로아티아의 리에카)를 왕복하는 노선에 투입되었다. 승객의 다수는 중동부 유럽에서 미국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넘어오는 이민자들이었다.


1912년 4월 14일은 카르파티아호가 뉴욕에서 출항한지 사흘 째 된 날이었다. 이날 밤 카라파티아호의 무선수 ‘해롤드 커텀’은 침대에서 헤드셋을 끼고 누워 있던 중 메사추세츠의 ‘케이프 코드’에서 타이타닉호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무전을 접수한다. 커텀은 즉시 타이타닉호와 교신을 하였는데 회신은 “배가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 중”이라는 충격적인 조난신호 및 지원 요청이었다. 커텀은 즉시 당직실의 상급 승무원들에게 내용을 전달 하였지만 당시 ‘세계 최대의 여객선’이 침몰 중이라는 무전 내용에 대해 승무원들은 반신반의 하는 상황이었다. 시간만 허비하고 있다고 느낀 커텀은 즉시 취침 중인 선장 ‘아더 로스트론’을 깨우고 상황을 보고했다. 로스트론 선장은 즉각적으로 대형 사고 임을 직감했고 타이타닉 방향으로 배를 움직이도록 지시했다. 수백 명의 소중한 목숨을 구한 결정은 이렇게 내려졌다.


당시 카르파티아호는 타이타닉호 사고 현장에서 약 100km 지점에 있었는데 배의 속력을 볼 때 대략 3시간 반에서 4시간 내로 도착 할 수 있는 거리였다. 문제는 타이타닉호가 침몰까지 얼마나 버텨 주느냐였다. 로스트론은 가능한 빠른 시간에 도착하기 위해 차가운 바다 바람에도 불구하고 배의 난방과 온수 시스템을 차단하도록 명령했다. 모든 동력을 엔진에 집중하여 보다 빠른 속도를 내기 위함이었다. 2시간 반 정도 항해를 하자 유빙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이어서 더욱 큰 빙산들도 관측 되었다. 빙산들을 피하기 위해 방향을 지그재그로 조정하는 가운데 카르파티아호 역시 타이타닉호와 같은 충돌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이러한 어려운 과정을 거치며 결국 새벽 4시경 사고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대한 타이타닉호는 이미 북대서양의 차가운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뒤였다.


이제 여명의 어두컴컴한 상황에서 본격적인 구조 작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20척의 구명 보트를 확인하여 카르파티아호로 인도하고 생존자들 한 명, 한 명을 끌어 올리는 대단히 지난한 작업이 무려 4시간 이상 지속 되었던 것이다. 사전에 로스토론의 명령으로 배 측면에 조명이 설치 되었고 구명정이 즉시 내릴 수 있게 준비 되었다.주방에서는 대량의 커피와 수프를 끓이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구명 보트들은 큰 사고 없이 수습되었고 오전 8시 반에 마지막 보트를 발견하여 구조를 완료 하였다. 최종적으로 승선 인원 중 705명의 사람들이 구조 되었다. 카르파티아호에 올라온 생존자들은 즉시 따뜻한 음료와 음식 그리고 담요 등을 제공 받았고 기존 승객들 및 승무원들의 진심 어린 위로를 받으며 안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가족이나 지인들의 생사를 모르는 생존자들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엄청난 무력감에 짓눌려 있었다.


로스트론 선장은 생존자 중에 화이트스타 라인의 회장인 ‘브루스 이스매이’가 있음을 발견했는데 즉시 배의 항로에 대해 상의하기 시작했다. 배의 운영에 따른 비용으로 따진다면 유럽 쪽 방향이 유리했지만 사실 사고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캐나다의 핼리팩스였다. 양측은 상의 끝에 결국 원래 타이타닉호의 목적지이자 카르파티아호의 출발지였던 뉴욕으로 회항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배가 뉴욕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온갖 신문 및 미디어에서 사고 내용을 무선으로 전달하는 대가로 금품을 제공하겠다며 승무원들을 꼬드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로스트론 선장은 생존자 명단 및 상태 외에 어떠한 사고 내용도 언론에 전송되지 못하도록 내부 단속을 했다. 결국 카르파티아호는 4월 18일 오전, 폭우가 내리는 뉴욕 항에 입항했다. 엄청난 비가 내리는 중이었지만 사고 소식에 목마른 기자들이 배의 옆을 따라 가면서 확성기로 온갖 질문들을 쏟아 내었다.


뉴욕에 도착한 로스트론 선장과 승무원들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았다. 이들의 결단력과 신속한 행동 덕분에 705명 이라는 귀중한 생명이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모든 승무원들이 타이타닉 구조 메달을 받았고 특히, 로스트론 선장은 태프트 대통령으로부터 백악관에 초대 되어 ‘미의회 메달’을 수여 받았다. 그는 이후 1차대전에도 참전하여 여객선 선장으로서 병력 수송에 적극 참여 하는데 이 모든 공적을 인정받아 1926년에 국왕 조지 5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는 커다란 영광을 얻었다.


그리고 구조의 핵심이었던 카르파티아호는 1차 대전 중인 1918년 7월 15일에 영국 리버풀 서쪽에서 미국으로 향하던 중 독일 잠수함을 만나 격침된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223명의 승선 인원 중 거의 대부분인 218명이 구명 보트를 타고 생존 했다는 점이다. 자신이 구한 타이타닉호의 침몰 이후 강화된 법규에 따라 모든 승선인원에 맞게 보트가 준비 되었고 대다수가 생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타이타닉이 자신을 도와 준 카르파티아호에게 건넨 의도치 않은 보은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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