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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Apr 24. 2022

1911년, 남극점 정복

20세기 100장의 사진 (1)

남극점에 꽂힌 노르웨이 국기

1912년 3월 7일, 호주 남부 태스매니아 섬의 호바트에서 전세계를 놀라게 할 전보가 타전 되었다.  전보를 보낸 사람은 노르웨이 남극탐험단의 대장인 로알 아문센이었고 그 내용은 자신의 탐험대가 최초로 남극점을 정복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는 노르웨이 극지 탐험의 대부인 ‘프리트요프 난센’ 그리고 노르웨이의 국왕인 ‘호콘 7세’에게 해당 전보를 보냈다. 아문센의 성공은 모든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당시 덴마크에서 독립한지 6년 밖에 안된 신생 노르웨이 왕국은 열광적인 환호성으로 들끓고 있었다. 사실 아문센의 남극점 정복은 그 이전 해인 1911년 12월 14일에 달성 되었다. 하지만 당시 통신 기술의 한계에 따라 전보를 보낼 수 있는 장소까지 이동 하는데 두 달이 걸렸고 3월이 되어서야 위대한 소식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남극점을 향한 레이스를 벌였던 영국 탐험단의 로버트 스콧 대장 일행이 귀환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며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들 둘에게 도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 것일까?


남극은 20세기 초까지도 그 실체가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과거 여러 탐험가들이 그 일대 바다와 빙산을 관측하였는데 본격적인 남극 탐험의 신호탄을 알린 것은 1896년의 벨기에 남극 탐험대였다. 이들은 벨기에 해군 장교인 ‘아드리앙 드 제를라슈’의 지휘 아래 ‘벨지카’라는 배를 이용해 탐험을 시작했다. 하지만 벨지카호는 남극의 벨링하우젠 바다에서 빙산에 갇히게 되었고 거의 1년의 시간을 이동하지 못하게 되었다. 식량이 떨어져 가는 상황에서 대장인 드 제를라슈는 펭귄이나 물개 고기 먹는 것을 엄금해서 대원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더불어 비타민의 부족에 따른 괴혈병이 대원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을 경험했던 대원들 중에 바로 노르웨이인인 로알 아문센이 있었다. 그는 이 때의 경험을 세세히 기록하고 문제의 본질과 이의 해결 방법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이듬 해인 1899년 2월 여름이 되어서야 벨지카호는 얼음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노르웨이로 돌아온 아문센은 계속 극지 탐험에 전념했다. 이번에는 방향을 돌려 북극해를 가로 지르는 소위 북서항로 (North-west passage)를 탐험하고자 했는데 1903년 6월에 소형 범선을 이용해 그린란드를 향해서 출발한다. 그의 목표는 캐나다 북쪽의 알려지지 않은 섬들을 지나 태평양의 베링해 쪽으로 빠져 나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출발 4개월 후에 배는 얼음에 갇히게 되고 무려 2년이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게 된다. 하지만 이 어려운 시기를 그는 대단히 유용하게 활용 했는데 현지 원주민들과 교류를 통해 의복과 식량 등 극지에서의 생존 방법에 대한 많은 것들을 익히게 된 것이다. 이후 얼음에서 빠져 나온 그와 일행은 1906년 8월에 북서항로를 통과해서 알래스카에 도착했고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귀국한다. 사상 최초로 성공적인 북서항로 탐험을 마치고 돌아온 그를 노르웨이 사람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일약 34세의 나이에 아문센은 노르웨이의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미 그는 다음의 목표를 정하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북극점이었다.


아문센은 새로운 목표를 향해 준비를 하며 스승과 같은 난센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듣게 된다. 난센은 얼음 위를 달리는데 추위에 강한 그린란드 개와 썰매의 유용성을 강조했고 고위층과의 만남을 주선하여 필요한 자금에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사실 난센의 가장 큰 도움은 바로 극지 탐험에 최적화된 배인 ‘프람호’를 대여해 준 것이었다. 프람호는 이전의 난센의 여러 탐험에 사용 되었는데 동그란 선체를 통해 얼음 위를 쉽게 빠져 나아갈 수 있는 독특한 구조였던 것이다. 아문센은 함께 여정을 떠날 대원들을 모집하였는데 가장 중요시 했던 것이 설원에서 이동할 수 있는 능숙한 스키 실력이었다. 또한, 캐나다의 이누이트 원주민에게서 배운 대로 동물 모피로 된 더 따뜻한 방한복을 준비 하였다. 이러한 요소들이 하나, 둘 모여 훗날 남극점 레이스에서 영국 탐험대를 앞 설 수 있는 중요한 요인들이 된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갖춘 아문센은 1910년 6월에 목적지를 향해 조용히 출발한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북극으로 가는 루트는 남미를 돌아 태평양을 북상하여 베링해로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이 때 그의 심경에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1909년 하반기에 미국의 ‘로버트 피어리’와 ‘프레데릭 쿡’ 등이 그들이 북극점에 도착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아문센은 북극점을 가봐야 이미 다른 사람들에 이은 두 번째라 생각했고 별로 의미가 없는 탐험으로 판단한다. 그는 이미 목표를 남극으로 잡았고 이를 대원들에게 숨기고 있었다. 결국 대서양에서의 마지막 기항지인 포르투갈령 마데이라 섬에서 대원들에게 그의 본심을 공유하고 대원들의 협조를 구한다. 모두가 긍정적인 태도로 남극 행에 동의했다. 아문센은 역시 남극으로 향하는 영국 탐험대의 스콧 대장에게 자신들의 행선지를 전보를 통해 알린다. 남극점을 향한 영국과 노르웨이 양국의 자존심을 건 레이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아문센의 프람호는 1911년 1월에 ‘로스 빙붕’의 우측에 위치한 곳에 정박하여 이곳에 ‘프람하임’이라는 전초기지를 만든다. 이곳을 베이스로 남극점까지 가는 여정에 필요한 식량과 연료를 저장하기 위한 3개의 보급 기지를 겨울이 오기 전인 4월까지 부지런히 구축했다. 식량은 주로 통조림과 물개고기였는데 신선한 고기를 통해 에너지도 얻고 괴혈병도 예방 할 수 있었다. 또한, 효율적으로 여정을 오갈 수 있도록 많은 이정표들을 중간중간에 설치하고 개들의 피로도를 줄이기 위해 썰매의 무게 감소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영하 50도 이하의 극한 겨울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문센은 9월에 영하 27도로 기온이 오르게 되자 때가 왔다고 판단하여 대원들을 이끌고 출발하였다. 하지만 곧 엄습한 눈폭풍과 혹한으로 인해 다시 프람하임으로 돌아올 수뿐이 없었다. 좀 더 추위가 물러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드디어 10월 19일에 그는 5명의 대원과 52마리의 개와 함께 남극점을 향한 장도에 오르게 된다. 출발 며칠 후에 다시 눈폭풍과 짙은 안개가 전진을 가로 막았지만 일행은 조금씩 극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따듯한 낮에는 이동을 자제하고 주로 밤에 움직임으로서 대원들의 컨디션을 적절하게 유지했다. 11월 17일에는 드디어 남극을 가로지르는 산맥에 도달 했는데 여정 중 가장 힘든 난코스였다. 3일에 걸쳐 이곳을 등정한 후 겨우 정상에 오르게 되었고 이제 극점까지 가는 마지막 코스가 남아 있었다. 52마리 개들 중 45마리가 살아 남았지만 많이 지쳐있었고 체력이 강한 18마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식용으로 도살 되었다.


마지막 코스 역시 추위와 위험한 ‘크레바스’ 등으로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드디어 12월 8일에는 이전에 달성됐던 ‘영국 섀클턴 탐험대’의 최남단 인 남위 88도 지점을 돌파했다. 그리고 드디어 12월 14일 오후 3시, 아문센의 탐험대는 남극점에 도달했다. 아문센은 남극점에 노르웨이 국기와 텐트를 설치 함으로서 그가 이곳에 왔다는 이정표를 남겼고 동시에 그와 레이스를 벌이고 있는 영국의 스콧에게 편지를 남겼다. 귀환 길에 오른 아문센 일행은 정확히 출발 99일이 지난 1912년 1월 25일에 모두 무사히 프람하임에 도착했다.


영국의 스콧 탐험대는 아문센보다 한 달이나 늦은 1912년 1월 17일에 남극점에 도착하였다. 이들이 본 것은 세차게 휘날리는 노르웨이 국기와 아문센이 남긴 텐트였다. 운반 수단인 조랑말들이 대부분 죽어버린 스콧 일행은 주로 사람이 직접 물건을 운반 했는데 체력 소모가 노르웨이 탐험대보다 훨씬 많았고 극도로 지쳐 있었다. 씁쓸한 패배감을 곱씹으며 로스 빙붕의 맥머드 기지로 돌아오던 일행은 하나, 둘 쓰려져 갔고 3월 말 경에 모든 대원들이 죽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들의 시체는 이듬 해 11월에 발견되었다.


남극점 탐험을 통해 아문센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영웅으로 전세계에 각인 되었고 이후에도 탐험을 지속하며 도전적인 삶을 영위해 나갔다. 스콧은 비록 남극점 레이스에서 패배하고 도중에 비참하게 사망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가진 영국인으로서 기억되고 추모되고 있다. 1957년에 지어진 미국의 남극탐사 기지는 ‘아문센-스콧 남극 기지’로 명명 되어 이들 두 사람의 위대한 정신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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