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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Mar 21. 2022

1910년, 위대한 흑인의 희망

20세기 100장의 사진 (1)

세기의 대결 중인 제임스 제프리 (좌)와 잭 존슨 (우)

미국은 전세계에서 온 다양한 인종이 모여 있는 나라다. 이런 미국에 인종 간의 갈등은 건국 이전부터 오랜 기간 동안 존재해 왔으며 때로는 폭동의 형태로 분출 되기도 했다. 많은 인종 충돌이 차별과 억압을 견디지 못한 흑인들의 분노로부터 시작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1910년 7월 4일에 발생한 폭동은 백인들이 주축이 되었는데 거의 전미국을 휩쓸며 전개 되었고20명 이상의 사망자와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희생자는 대부분 흑인으로서 분노한 백인들의 구타에 의해 발생했는데 한가지 의아한 것은 흑인 사회의 반응이었다. 미국 내 흑인 커뮤니티는 백인들의 폭동에 오히려 최대한 차분하게 대응하고 있었으며 사실은 거의 모든 흑인들이 일련의 폭동에도 불구하고 기쁨에 넘쳐 있었다. 이것은 ‘잭 존슨’ (Jack Johnson)이라는 한 흑인 권투 선수와 관련된 것이었는데 1910년 독립기념일에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했던 것일까?


잭 존슨은 1878년 3월 미국의 택사스주 갤버스톤에서 9명의 자녀 중 세 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가정도 당시의 여타 흑인들처럼 어려운 환경이었는데 그는 10대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 들어야 했다. 고향과 뉴욕을 전전하며 경마장, 마차제조 공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중 권투를 하는 여러 친구들을 알게 되었고 이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뉴욕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고 직장에서 해고된 후 다시 고향인 갤버스톤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다시 일거리를 찾던 그는 184cm에 이르는 큰 키 덕분에 동네 체육관에 경비원으로 채용 되었고 권투 글로브도 장만했다. 이후 틈틈이 내기 권투 (당시 텍사스주에서는 불법이었다.)를 하던 그는 20살이 되던 1898년 11월부터 본격적인 권투 선수로서의 커리어를 쌓아 나갔다. 그가 본격적인 명성을 쌓아 올리게 된 계기는 1902년 10월에 당대 흑인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프랭크 차일드’ (Frank Childs)를 이기고 나서부터이다. 이후 1903년 2월에는 ‘덴버 마틴’ (Denver Marin)을 이기고 ‘세계 유색인 헤비급 챔피언’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데 적어도 비백인 선수 중에서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후 그는 무려 17차나 방어에 성공하며 권좌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다음 목표는 바로 세계 헤비급 챔피언 (백인/비백인 통합)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1906년 이후 세계 헤비급 챔피언은 캐나다 출신의 ‘토미 번스’ (Tommy Burns)였다. 170cm의 단신이었던 번스는 빠른 움직임과 강한 주먹으로 세계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그 당시만해도 세계 헤비급 챔피언의 자리는 대대로 백인들이 차지했고 도전자 역시 백인이었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바뀌고 있었다. 흑인인 존슨은 1908년 12월에 백인 번스와 호주 시드니에서 세계 헤비급 챔피언 자리를 놓고 경기를 치루게 되었다. 이 경기를 위해 존슨은 번스를 무려 2년간 쫓아다니며 집요하게 경기를 요청했다. 치열한 난타전이 벌어졌고 결국 경기는 14라운드에서 승패가 결정되었다. 존슨이 승자가 되면서 최초의 흑인 출신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된 것이다. 경기 결과에 대한 미국 및 서구 백인들의 충격은 대단했다. 한 등급 아래로 보았던 흑인 출신에게 챔피언 벨트를 빼앗긴 상황 앞에서 자신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백인 우월주의는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었다. 당시 유명 작가이던 ‘잭 런던’ (Jack London)은 이러한 상황과 백인들의 바램을 담은 ‘위대한 백인의 희망’ (Great White Hope)이라는 표현을 만들어 냈다. 마치 성경의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나타나 백인들을 좌절감으로부터 구해주기를 바라는 심정을 담은 표현이었다.


백인들이 존슨의 승리에 혐오감을 갖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었다. 우선 그의 화려하고 눈에 띄는 패션 스타일이었고 더 중요했던 것은 당대의 금기였던 흑인으로서 백인 여성들과 염문을 뿌린 것이다. 그는 경기가 발생하는 도시마다 수많은 여성들과 만나고 관계를 맺었는데 그 대부분이 백인이었다. 공식적인 결혼도 3차례나 했는데 이 역시 상대는 모두 백인 여성들이었다. 이러한 그의 생활 방식은 보수적인 백인 남성들에게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위대한 백인의 희망이 등장했다. 바로 1910년 7월의 일이었다.   


전설적인 권투선수였던 ‘제임스 제프리’ (James Jeffries)는 1905년 이전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었다. 잭 존슨이 백인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부셔버린 1908년 말 그는 은퇴하여 농장 생활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와 잭 존슨의 대결을 권유했다. 처음에는 경기에 관심이 없다며 거절하던 그도 끈질긴 사람들의 설득과 $10만 이상의 대전료에 결국 경기 참여를 결정한다. 제프리는 “백인이 검둥이 (Negro)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며 경기 출전을 앞둔 소감을 밝혔다. 1901년 7월 4일 네바다주 레노에는 2만명의 관중이 운집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흥분 상태였는데 경찰은 만일의 사고에 대비해 총기 및 알코올 음료에 대해 철저한 단속을 했다. 심지어 흉기로 사용 될 수 있다는 판단에 사과 조차 소지가 금지 되었다.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는데 시종일관 존슨이 경기를 주도했다. 은퇴 후 수년을 쉬었던 제프리는 체력적인 면에서 많이 힘들어 보였다. 그리고 운명의 15라운드에서 제프리는 두 번이나 다운을 당했다. 그의 코치는 제프리가 KO패를 경력에 남기지 않도록 수건을 던졌다. 존슨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점이 백인들의 자존심을 더욱 바닥으로 내팽개쳐 버리게 된다. 이렇게 해서 전미국을 휩쓴 인종 폭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경기 이후 존슨은 인종을 뛰어넘는 위대한 복서로 떠오르며 백인들 중에서도 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5년간 타이틀을 더 방어하며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있었는데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1915년에 백인인 ‘제스 윌라드’ (Jess Willard)에게 챔피언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이후 존슨은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는 등 사업적인 수완을 보여주기도 했고 여성들과의 혼외 사생활로 인해 이혼 및 수감 생활을 겪기도 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는 결코 권투를 포기하지 않았고 60세까지 끊임없이 활동했다. 그의 진정한 대미는 트럼프 대통령이 장식했는데 2018년 그의 과거 전과였던 ‘부도덕한 사유로 여성을 주경계를 넘어 이동 시킨 혐의’에 대해 사면을 내렸던 것이다. 억압과 차별을 딛고 오히려 그 판을 바꾸어 버린 선구자로서 잭 존슨은 ‘위대한 흑인의 희망’이라 불릴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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