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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Mar 14. 2022

1909년, 최초의 군용 항공기 도입

20세기 100장의 사진 (1)

'통신단 1호기' 앞에서 시험 비행 준비 중인 프랭크 람과 오빌 라이트

세계 최초의 비행기를 발명한 라이트 형제는 1909년 7월 27일 미국 버지니아주의 군부대인 포트 마이어 인근에서 시험 비행을 앞두고 있었다. 1903년 그들의 고정익 기체가 키티호크에서 날아오른 이후로 시험 비행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이번 시험 비행은 기존의 어떤 비행보다도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시험 비행의 목적은 고객을 상대로 비행기의 성능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는데 그 고객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바로 미국 육군의 통신단이었던 것이다. 시험 조종사인 ‘프랭크 람’ (Frank Lahm) 중위는 윌버 라이트와 함께 침착한 태도로 비행기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비행기는 부드럽게 이륙했는데 주변 지역을 16km 이상 비행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최고 속도인 시속 45마일 (72km)를 달성했다. 미육군은 결과에 대단히 만족했으며 즉시 해당 비행기의 구매를 추진하였다. 세계 최초의 군용기인 ‘S.C No. 1’ (Signal Corps No. 1: 통신단 1호기)이 역사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미육군 통신단은 남북전쟁 이후로 기구 등을 이용해 신속한 정보의 전달과 정찰 업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과학의 발달로 인해 비행기와 비행선이라는 획기적인 발명품이 등장했고 이들은 제반 상황에 제약이 많은 기구에 골머리를 앓던 통신단에게 하나의 돌파구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미육군은 1908년 초 라이트 형제에게 군용 비행기의 공급 가능성을 타진했는데 요구 스펙은 다음과 같았다. 해당 비행기는 2인 이상의 무게 (160kg)를 견뎌야 하고 40마일 (64km)이상의 속도에 항속거리 125마일 (201km)을 달성해야 했다. 라이트 형제는 미육군의 요구에 그들의 모델 ‘라이트 모델 A’로 입찰 했는데 1908년 9월에 최초의 시험 비행이 이루어졌다. 초도 비행은 무난하게 성공했고 9월 17일에는 ‘빅터 메트칼프’ (Victor Metcalf) 해군성 장관 및 수 천명의 일반인 관중들 앞에서 최종적인 평가 비행이 실시 되었다. 하지만 손 쉬운 성공이 예측되던 비행은 끔찍한 악몽으로 변해 버렸다. 비행 도중 프로펠러가 쪼개지면서 조향타로 이어지는 줄이 잘려 나갔고 비행기는 순식간에 추락했던 것이다. 동승한 오빌 라이트가 갈비뼈와 다리, 골반에 중상을 입었고 시험 비행사는 사망하는 세계 최초의 항공기 인명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라이트 형제는 깊은 충격에 빠지게 되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이전 실패의 문제점을 철저히 분석하고 여러 차례 예행 연습을 반복했다. 대략 1년 후 재개된 2차 시험 비행은 엄청난 긴장 속에 실시 되었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깔끔한 성공으로 마무리 되었다. 라이트 형제는 군대 입찰을 통해 $25,000이라는 금액을 받았고 속도 등의 기록 갱신으로 $5,000을 추가로 받았다. 이후 미육군 통신단은 추가적인 비행기를 주문했다. 주요 용도는 우선 통신단의 목적에 맞게 연락기의 역할이었고 카메라의 발달과 함께 정찰기로서의 임무도 추가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항공기 관련 기술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는데 ‘통신단 1호기’는 높아지는 육군의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도입 불과 2년 후인 1911년에 ‘통신단 1호기’는 퇴역 대상이 되었고 보관을 위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으로 보내졌다.


이후 항공기의 무기로서의 가능성에 대한 다양한 실험이 실시 되었다. 1910년 8월 미육군 소위였던 ‘제이콥 얼 픽켈’ (Jacob Earl Fickel)은 항공기에 동승해 최초로 소총 사격을 실시하였다.  이는 공격 무기로서의 항공기의 가치를 재평가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또한 1910년 말 경에는 비행기에 기관총을 장착하는 방안이 연구되고 있었고 미국인 유진 엘리 (Eugene Ely)는 순양함 버밍햄에 목재판을 붙인 소형 활주로에서 이륙 함으로서 항공모함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1911년에 오스만 터키와 전쟁 중이던 이탈리아는 군용기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의미있는 활동을 보여 주었다. 이탈리아군이 비행기를 동원해 서부 리비아에서 이동 중인 실제 오스만 터키군의 모습을 촬영하였던 것이다. 더불어 동일 전쟁에서 이탈리아의 육군 중위인 ‘줄리오 가보티’ (Giulio Gavotti)는 독일제 ‘에트리히 타우베’ (Etrich Taube) 단엽기로 터키군 진영에 수류탄 4발을 투척 함으로서 세계 최초의 공중 폭격을 실시 했다. 오스만 터키는 이에 대해 비행선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것은 1907년의 ‘헤이그 협정’ 위반이라고 강력히 항의했지만 이탈리아는 “비행기는 공기보다 무겁기 때문에 (즉, 비행선이 아니므로)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가볍게 일축했다.

                

이러한 초창기의 여러 시험과 시행착오를 거치며 비행기는 무기로서의 기능을 빠르게 갖추어 가고 있었다. 영국은 1차대전 중인 1918년 4월에 최초로 육해군과 분리되는 별도의 공군 (Royal Air Force)을 창설했다. 현재의 미국 공군이 육군으로부터 독립한 것은 훨씬 훗날인 1947년 9월이었는데 시기만 늦었을 뿐이지 이때 이미 미공군은 백만 명 이상의 병력과 수많은 전술, 전략 폭격기 및 핵폭탄 투발 수단까지 갖춘 세계 최강의 군대였다. 미공군은 이 지위를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지하고 있고 이 모든 것은 1909년 여름에 한 대의 초라한 비행기와 용감한 시험 비행사들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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