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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Mar 13. 2022

1908년, 중동 석유의 발견

20세기 100장의 사진 (1)

마스예드 솔레이만의 석유 발굴 장면

이란 서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 ‘마스예드 솔레이만’은 매우 황량하고 건조한 곳이다. 1908년 5월 26일 새벽에 이 외지고 황량한 곳에 일단의 사람들이 거대한 석유 시추 기구 주위에 모여 있었다. 시추 팀의 리더는 ‘조지 레이놀즈’라는 영국인으로 이미 1902년부터 이란에서 석유 탐사를 진행해왔던 베테랑이었다. 하지만 그는 외부인에 적대적인 현지 주민들과 풍토병 그리고 부족한 식수로 인해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있었다. 더불어 아직까지 경제성을 지닌 의미 있는 시추 성과는 보이지 않았고 시간과 비용만 소모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새벽 4시경 인부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웅성거림은 유전 발굴에 따른 환호성으로 바뀌게 된다. 근 6년에 걸친 지루하고 성과없던 탐사가 극적인 성공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 모든 성취 뒤에는 한 사람의 강한 집념이 녹아 있었는데 그 이름은 ‘윌리엄 녹스 다시' (William Knox D’arcy)라는 또 다른 영국인이었다.   


윌리엄 녹스 다시는1849년에 영국 남서부의 데븐 지역에서 법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6년에 어려워진 집안 사정으로 인해 호주 퀸즐랜드로 이민가게 되는데 이곳에서 법학을 공부 하면서 아버지의 일을 돕게 된다. 그는 금광업에 종사하게 되는데 거의 폐광이 된 곳에서 새로운 금을 찾으면서 문자 그대로 거부가 된다. 호주와 뉴질랜드 일대의 여러 광산들을 경영하며 큰 돈을 만지게 된 그는 1889년에 영국으로 금의환향하게 되고 새로운 투자거리를 찾아 동분서주한다. 이 때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는데 당시에 산업 측면에서 나날이 가치가 격상되고 있던 자원인 석유였다.


1890년대 이후 바로 이 석유로 인해 사막과 불모지로 덮여있던 중동 지역이 열강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그 중에서도 이란 (당시 국명은 페르시아)은 각종 학계의 연구나 탐사를 통해 많은 양의 석유가 묻어 있을 것으로 예상 되고 있었다. (현재 석유의 대명사인 사우디아라비아는 당시 나라가 세워지지도 않았고 오스만터키 제국의 한 지역일 뿐 이었다.) 열강 중 가장 먼저 산업화에 성공한 영국이 페르시아의 석유 발굴 가능성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석유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도 존재했다. 당시 영국은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놓고 러시아와 대결 했는데 페르시아는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고 수에즈운하와 보석과도 같은 인도로 가는 중간 통로에 위치했다. 페르시아가 러시아 영향권에 들어 간다는 것은 영국 식민지 경영 전략에 큰 위협이었고 잠재적 발굴 가능성이 큰 석유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시는 이러한 조국의 상황을 이해했고 발 빠르게 움직여서 페르시아에 석유 채굴권을 얻기 위한 자신의 대표단을 보내게 된다.


다시의 대표단은 현지 영국 파견 인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페르시아 정부 고위 인사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당시 왕정이던 페르시아의 실권은 ‘샤’인 모자파르 알딘이 가지고 있었다. ‘샤’는 초기에는 협상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결국 다시가 뇌물 성격의 추가 현찰을 제시 하는 것으로 승부수를 던지자 그는 다시의 대표단과 석유 채굴권에 대한 ‘다시 협약서 (D’arcy Concession)’를 맺게 된다. 1901년 5월의 일이었다. 협약서는 총 18개 조항으로 되어 있었는데 다시에게 원유, 천연가스, 아스팔트 등에 대한 독점적인 석유 채굴권을 주었다. 다시가 탐사 및 채굴 할 수 있는 지역은 페르시아 북부를 제외한 영토의 4분의 3에 달했는데 러시아와 접한 북부는 외교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해 영국 정부에 의해 배제 되었다.


1902년부터 시작된 석유 발굴은 45도 이상을 오르내리는 페르시아의 무더위와 싸우며 진행 되었다. 하지만 1903년까지 소규모의 경제성 없는 유전 몇 군데가 발견 되었을 뿐이었고 1904년이 되자 다시는 자금이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해군성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상황이 평탄치 않음을 파악한 해군성은 다시 협약이 타국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했다. 그들의 결론은 ‘버마 석유’ (Burmah Oil Company)라는 영국의 회사와 ‘다시 협약서’를 공동으로 진행토록 만드는 것이었고 이를 통해 페르시아 석유 탐사가 진행 될 수 있었다.


발굴은 장소를 옮겨 페르시아 남서부의 마스예드 솔레이만으로 이동했지만 여전히 성과는 없었고 1907년이 되자 다시는 자신의 지분 대부분을 버마 석유에 넘기게 된다. 그리고 1908년으로 넘어가자 이제 영국에서도 포기하는 분위기가 역력했고 현지 기술자들에게 장비 철거 및 인원 철수를 하라는 지시가 보내졌다. 하지만 현지의 탐사 팀은 이를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 상태에서 시추공을 뚫던 중 경제성 있는 유전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발굴은 다시와 영국 정부에게 있어 거대한 승리였고 기나 긴 노력에 대한 보상이었다. 이후 다시는 페르시아 석유를 위해 1909년에 신설된 앵글로-페르시아 석유회사 (Anglo-Persia Oil Company: APOC)를 맡게 된다. 그리고 페르시아만의 아비잔에 정유소를 세우는 등 석유의 정제, 비축 및 판매를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게 된다. 앵글로-페르시아 석유회사는 1954년에 그 이름을 ‘브리티시 페트롤리움’ (British Petroleum)으로 변경 하는데 이 회사의 현재 사명이 바로 세계 80여 개국에서 사업을 진행 중인 ‘BP’이다.


1908년 5월의 마스예드 솔레이만에서 석유를 발굴한 사람들은 오랜 시간에 걸친 노력과 극적인 결과에 대단히 기뻐했지만 자신들의 발굴이 그 이후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것인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발굴은 중동 지역 내 최초의 메이저 석유 발굴이었으며 이를 통해 중동국가들은 자신들의 바램과는 다르게 강대국의 입김을 강하게 받는 전략적 지역이 되고 만다. 한 때는 누구도 관심이 없던 검은 액체를 통해 드디어 석유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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