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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Feb 14. 2022

1906년,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등장과 건함 경쟁

20세기 100장의 사진 (1)

HMS 드레드노트

1906년 2월 10일 영국의 포츠머스 항에서는 다소 특별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행사장에는 국왕인 에드워드 7세를 비롯한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모두 모였는데 바로 영국 해군의 신형 전함을 진수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당시 영국 해군은 500여척 가량의 군함을 보유하며 전세계 바다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런 영국 해군 입장에서 배 한 척 진수하는 것쯤이야 그리 특별할 것도 없어 보였지만 사실 이 배는 특별함 이상의 그 무엇 인가를 가지고 있었다. 이 배의 이름은 영국 해군의 전통 있는 전함 이름을 딴 ‘드레드노트 (Dreadnaught)’였는데 과연 이 배에는 어떤 특별함이 있었던 것일까?


1871년 독일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통일을 이룬 이후로 유럽은 소위 ‘벨 에포크’ (La belle epoche: 보불전쟁부터 1차대전까지 40년간 유럽에서 강대국 간 큰 전쟁이 없던 시기)의 평화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도 떠오르는 신흥 강국인 독일과 기존 맹주인 영국, 프랑스는 크고 작은 갈등을 겪고 있었다. 후발 주자인 독일은 자신의 신장하는 국력에 걸 맞는 대외 영토를 가지고 싶어했지만 이것은 영국, 프랑스의 이해 관계와 상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갈등의 정점이 1905년의 ‘모로코 위기’로서 모로코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며 내정 개혁을 요구하는 프랑스와 이에 반대하는 독일이 대척점에 서게 되며 간신히 무력 충돌을 피했던 상황이 전개 되었다.


독일의 대외 팽창은 특히 영국에게 경각심을 주게 되었는데 독일이 해외 진출을 위한 일련의 과정에서 해군력을 대폭 강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은 1898년 이후 해군대신이었던 ‘알프레드 폰 티르피츠’의 지휘 아래 5차에 걸친 ‘건함 법안’을 제정 하였고 비약적인 산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강력하게 관련 정책을 추진해 나가고 있었다.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서 기존의 헤게모니를 지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평범한 틀을 뛰어 넘는 그 무엇인가가 필요한 시점 이었다.

당시 영국 제1 해군경 (해군 참모총장)이던 존 피셔는 일련의 상황 속에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결국은 독일 등 잠재적 적국이 감히 넘볼 수 없는 한 방이 필요한 상황 이었는데 그는 당시 일부 군사이론가들에 의해 주장되고 있던 ‘거포주의 (All big gun) 이론’에 주목하게 된다. 거포주의는 전함의 모든 포를 12인치 (305mm) 이상의 거포로 채우고 원거리에서 공격을 통해 적을 섬멸하자는 주장 이었다. 하지만 당시 기술로는 원거리로 갈수록 포탄의 정확도가 떨어지는 문제점이 있어 영국 해군은 이를 쉽사리 수용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포주의 이론을 뒷받침 해주는 사건이 발생 하게 되는데 바로 러시아와 일본이 쓰시마섬 북방에서 양국의 운명을 건 진검 승부를 벌이게 된 것이다. 1905년 5월 27일, 지구를 한 바퀴 돌아 극동아시아까지 온 러시아의 발트함대는 일본제국의 연합함대와 조우하게 되었다. 러시아 함대는 ‘포트 아르투르 (뤼순항)’에 포위된 자국군대를 구출 하기 위해 출발 했지만 항해 도중인 1905년 1월에 일본군이 포트 아르투르를 점령해 버렸다. 이후 러시아 함대는 극동의 자국 영토인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하려 한다. 이를 예상했던 일본군은 12인치 주포로 무장한 자국 전함들을 통해 러시아 함선들을 격파하기 시작했고 이는 영국군 관전 무관에 의해 본국에 전달 되었다.    


이렇게 해서 새로 건조될 예정인 전함인 ‘HMS 드레드노트 (HMS : His Majesty’s Ship, ‘폐하의 군함’이라는 뜻으로 영국 해군의 군함에 붙인다.) ’에는 포탄 무게만 0.5톤이나 는 10문의 12인치포와 보다 작은 27개의 12파운드 포가 장착 되는 것으로 결정 되었다. 방어 측면에서는 홀수선 아래에 격벽 구조를 채택하여 외부 피격 시에도 해수가 선내로 유입 되는 것을 최소화하려 했다. 더불어 당시 최신 기술이던 증기 터빈을 사용 했는데 이를 통해 만재배수량 21,060톤의 육중한 배가 20노트 (39km)라는 쾌속으로 이동이 가능했다. 영국드레드노트 전함 혼자 적국의 구형 전함 3척을 상대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한 마디로 드레드노트는 공격, 방어, 이동의 측면에서 당시 최신 기술의 집약체이자 대영제국 해군의 막강함을 상징하는 배가 된 것이다.     


드레드노트의 진수 소식을 들은 주요 열강들은 일시적으로 충격과 놀라움에 빠졌다. 순간 전세계의 모든 전함이 드레드노트 ‘이전 급’과 ‘이후 급’으로 분류 될 정도로 그 파급력은 대단했다. 하지만 이들 국가들이 다시 회복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영국이 드레드노트를 진수 할 시점에 이미 주요 해군국들 역시 비슷한 구상을 했고 제작을 준비 중이었다. 영국은 단지 이러한 분위기에 불을 붙인 것이었는데 드레드노트는 각국의 건함 레이스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영국의 최대 숙적인 독일 해군은 누구보다도 빠르게 이 레이스에 참여하였고  이듬 해인 1907년에 ‘나사우급 전함’을 건조하며 영국의 아성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후 미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등이 경쟁적으로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건조하였고 이는 이미 국력이 쇠하였던 오스만 터키나 심지어 남미의 브라질, 칠레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것은 국가 재정에 엄청난 출혈을 강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국은 건조를 지속 했는데 이 당시의 드레느노트급은 국가의 상징인 동시에 현대의 핵무기와 같은 위상을 지니고 있어서 단순한 돈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흘러 1차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드레드노트의 의미는 과거와는 다르게 퇴색되어 버렸는데 이를 증명 하기라도 하 듯 영국은 종전 후인 1919년에 드레드노트를 퇴역 시켰다. 이후 1922년의 워싱턴 군축조약을 통해 더욱 많은 군함들이 퇴역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변화 일 뿐 몇 년 지나지 않아 각 국은 다가오는 다음 전쟁을 위해 ‘초거대전함’이나 ‘항공모함’ 등 더욱 방대한 프로젝트 준비에 몰두하게 된다. 바다에서 새로운 방식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드레드노트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 함명은 혁신적이고 모든 것을 압도한다는 뜻을 지닌 단어로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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