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준호 Oct 06. 2022

1904년, 헤레로-나마족 학살

20세기 100장의 사진 (1)

독일군에 의해 체포된 헤레로족 포로들

2004년 8월 독일 개발부 장관인 ‘하이데마리 비쇼렉-초일’은 남서 아프리카에 위치한 나미비아를 방문했다. 과거 독일 제국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제외 하고는 독일과 거의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곳에서 비쇼렉-초일 장관은 국제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킬 발언을 하게 된다. 그녀는 과거에 발생했던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당시 가해자였던 독일 정부를 대표해서 사과를 전달했던 것이다. 그 사과의 대상은 바로 나미비아의 주요 부족인 ‘헤레로족’과 ‘나마족’이었는데 정확히 100년 전인 1904년에 벌어진 사건의 피해자들이었다. 이것이 국제적인 이슈가 된 것은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에 벌어진 여러 비극적 사건에 대한 흔치 않은 사과였기 때문이다. 독일 및 서구 국가들은 이러한 사과를 높게 평가 했지만 나미비아 측의 반응은 그다지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단지 한마디 사과로 모든 것을 정리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고통과 아픔이 남아 있었다. 과연 100년 전 이곳 나미비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871년 ‘보불 전쟁’에서 승리한 후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주도로 ‘독일 제 2 제국’이 성립 되었다. 독일 제국은 유럽의 신흥 강자로서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고 곧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된다. 하지만 전세계 대부분의 지역이 이미 영국, 프랑스 등 기존 열강의 영향권에 있었고 독일은 이들의 세력이 미치지 못한 태평양 도서와 아프리카 일부에 집중하였다. 그 중에서도 독일은 중부 아프리카의 카메룬, 남서부의 나미비아와 동부의 탄자니아 등을 식민지로 삼았고 다른 열강과 마찬가지로 현지인들을 수탈하기 시작한다.


그 중 나미비아는 가장 영역이 컸던 곳으로서 1885년에 독일의 보호령이 되었는데 여러 부족들이 서로 반목하는 상황이었다. 1894년에는 군인이자 행정 관료였던 ‘테어도어 로이트바인’이 총독으로 부임했고 더욱 많은 독일인들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신천지로 들어온다. 하지만 이들이 꿈꾸는 신천지는 백인이 지배 민족이 되는 ‘새로운 독일’이었다. 이것은 현지인들에게는 강압적인 노예 생활을 의미 했는데 독일인들은 현지의 ‘헤레로족’과 ‘나마족’ 등의 토지와 가축을 수탈했던 것이다. 나미비아의 ‘미개한 부족’들과 친구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던 독일인들은 현지인들에 대한 폭행 및 성적 학대 등의 비행을 저지르게 되고 현지 지배계층의 권위를 부정한다. 1903년이 되자 독일 당국은 현지인들의 땅을 더욱 빼앗고 이들을 특정 보호구역에 수용 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양측의 갈등은 급속히 악화 되었고 현지인들의 분노가 임계점을 넘기 시작한다.


해가 흘러 1904년 1월이 되었고 남부 쪽의 코이산족이 독일 주둔군에 대항해 소규모 저항을 시작한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북부에 주둔하던 독일군의 상당수가 이동한 상황에서 헤레로족과 나마족은 저항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이들은 방어가 빈약했던 중부 오카한냐의 독일인 정착지를 우선적으로 기습하는데 이 공격에서 백 명 이상의 독일인들이 살해 당했다. 양 부족은 여세를 몰아 독일의 철도와 전신 시설을 파괴하고 순식간에 군 시설도 점령한다. 특히, 헤레로족은 희생자들의 신체를 절단하여 잔인하게 죽였는데 결국 독일 본토에까지 이들의 반란 소식이 알려지게 되었다. 황제인 빌헬름 2세는 물론 다수의 독일 의원들이 미개한 원주민에 당했다는 사실에 엄청난 분노를 느끼게 된다. 즉각적인 병력 증원이 결정 되었고 10,000명의 독일군이 나미비아로 파견 되었다. 이 때 헤레로족과 나마족의 운명은 이미 결정 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빌헬름 2세는 4년 전인 1900년 중국의 ‘의화단 사건’ 당시 독일 외교관이 피살 당한 것에 대한 대응으로 ‘아틸라의 훈족과 같이’ 철저한 보복을 하도록 명령한 전례가 있었다.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무엇보다도 파병된 독일군들 스스로가 격렬한 분노와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로타르 폰 트로타’ 중장 지휘 하의 독일군은 5월부터 나미비아에 들어왔는데 빠른 속도로 헤레로족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특히, 8월에 ‘바르터베르크’ 고원에서 벌어진 전투는 신식 기관총과 대포를 가진 독일군에 의한 일방적 학살이었다. 결국 저항은 분쇄 되었지만 독일인들은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고 헤레로족과 나마 족에게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군은 우선 바르터베르크 전투의 생존자들을 대부분 살해했다. 이후 남아 있는 헤레로와 나마족 인원들을 동부의 사막 쪽으로 몰아 넣게 된다. 가혹한 이동 과정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많은 부족민들이 쓰러졌고 즉시 독일군에 의해 총검으로 처형 되었다. 간신히 독일군을 벗어난 사람들은 영국령 보츠와나로 탈출하기 위해 계속 발걸음을 옮겼지만 대부분 ‘칼라하리 사막’의 뜨거운 태양과 무더위 속에서 생명을 잃어갔다. 독일 본토의 높으신 분들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 하나 대량 학살을 중단 시키지 않았다. 이렇게 헤레로와 나마족은 사실상 전 부족이 전멸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1904년 말에 잔존 인원들은 대서양 연안의 ‘상어섬’에 위치한 강제수용소에 수용된다. 이곳은 말이 수용소였지 사실상의 인간 도축장이었다. 부족한 식사에 중노동과 병사들의 가혹행위에 시달리던 수용자들은 80% 이상 죽어 나갔다. 심지어 수용소 안에서는 부족민들을 대상으로 끔찍한 생체 실험이 자행 되었는데 의사들은 피실험자의 뼈와 두개골을 수집해 베를린으로 보냈다. 1904년에서 1907년 사이에 총 65,000명에서 10만 명 사이의 헤레로-나마족이 학살 당한 것으로 파악 된다. 독일인들에게 홀로코스트는 이미 20세기 초에 시작 되었던 것이다.


2004년의 독일 개발부 장관의 사과는 사건 발생 후 무려 100년 만의 일 이었다. 너무나 늦은 감이 있었지만 독일 정부의 공식적인 첫 번째 인정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독일 정부는 보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에 대한 협의가 시작된 것은 2015년의 일이었다. 유대인 학살에 대한 보상과는 달리 독일 정부는 학살과 보상이라는 용어를 쓰기를 꺼려했고 인프라 지원 등을 통해 협상을 매듭 지으려 했던 것이다. 결국 2016년에 독일 정부는 해당 사건에 대해 대량학살 (Genocide)을 인정했고 추가 협상을 거쳐 2021년 5월에 최종 11억 유로를 보상하는 것으로 타결 지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무려 117년이 걸렸지만 아직도 나미비아의 헤레로-나마족들은 조상들이 빼앗긴 땅을 되찾지 못하고 빈민층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두 부족들의 비극적인 사례는 정의라는 것이 힘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 만의 전유물이라는 국제 사회의 냉엄한 현실을 거듭 깨닫게 해준다.

이전 03화 1903년, 키시니예프 포그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