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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Dec 26. 2021

1903년, 키시니예프 포그롬

20세기 100장의 사진 (1)

키시니예프 포그롬 당시 훼손되었던 토라 (유대교 경전)의 매장 의식을 진행하는 유대인들

1903년 4월 28일자 뉴욕타임스에는 러시아에서 발생한 한 사건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내용은 러시아 제국 남부 베사라비아 지역의 키시니예프 (오늘날 몰도바 공화국의 키시나우)에서 포그롬 (반유대 폭동)이 일어 났다는 것이었는데 현지의 유대계 신문 기사를 인용한 그 내용은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백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살해 당했고 오백 명이 넘게 부상 당했으며 심지어는 폭도들이 아이들을 갈기갈기 찢어 죽였다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내용이었다. 대규모 반유대 폭동에 대한 소문이 4월 말부터 돌기 시작했는데 이 기사를 통해 소문이 사실 임이 확인 되었다. 즉시 미국의 유대인 단체들이 엄청난 분노를 표출했고 사건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증폭 되었다. 어떻게 백주 대낮에 유럽계 문명 국가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러시아 당국은 이러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국제적 비난 여론이 강하게 일게 되었다. 도대체 1903년 4월, 키시니예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건의 발단은 두 명의 기독교인 아이들의 죽음으로부터 시작 되었다. 키시니예프 인근 마을에서 미하일 리바첸코라는 한 우크라이나 소년이 실종 후 죽은 체로 발견 되었고 다른 한 명의 소녀가 음독 자살 기도를 했는데 마침 유대인 소유 병원에서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여기까지는 그저 단순한 일련의 사고사로 볼 수 있었는데 기름에 불을 지르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다. 반유대 성향의 러시아어 지역 신문인 베사라베츠에서 이들의 죽음이 지역의 유대인 공동체와 관련 있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베사라베츠는 유대인들이 유월절에 만드는 무교병 (효모가 없는 빵)에 기독교인의 피를 섞기 위해 의도적으로 살해 했다고 기사를 내었고 헤드라인에 “유대인에게 죽음을!”이라는 지극히 악의적인 제목을 달았다. 유대인들이 기독교인의 피를 얻기 위해 인신공양을 한다는 믿음은 동유럽 및 러시아 일대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해당 기사는 그릇된 믿음에 대한 주민들의 잠재적 분노를 표출 시켰고 이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마침 시기적으로 부활절이었고 4월 19일 교회에서 부활절 예배가 끝난 후 본격적인 폭동이 시작 되었다. 당시 키시니예프 거주민의 4분의 1인 55,000명이 유대인이었던 지라 폭도들이 목표물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이들은 유대인 거주지로 몰려가서 닥치는 대로 때리고 파괴했으며 심지어는 강간까지 서슴지 않았다. 러시아 경찰은 폭도들이 몰려 다니며 만행을 저지르는데도 수수방관 했다. 사흘 간 광란의 폭동이 펼쳐졌는데 무려 49명의 유대인들이 살해 당했고 600명 이상의 여성들이 강간 당했다고 파악 되었다. 불에 타거나 약탈 당한 유대인 소유의 상점 및 가옥에 대한 피해는 계산조차 할 수 없었다. 현지 유대인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지만 이들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여전히 다수의 현지인들은 자신들을 증오했으며 공권력도 자신들 편이 아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테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미국 정부에서 러시아 측에 항의했는데 당시 미국 주재 러시아 대사는 이것을 인종이나 종교 간 갈등이 아닌 소작농과 채권자 사이의 단순한 채무 문제로 치부하려 했다. 즉, 돈이 있는 유대인들이 현지인들에게 고리대금을 하며 쌓인 갈등과 불만이 터지게 되었다는 해괴한 논리였다. 짜르 니콜라이 2세에게 사태의 해결을 촉구하는 미국민들의 청원서가 전달 되었지만 거부 되었다. 러시아 황실은 1881년에 당시 짜르였던 알렉산드르 2세가 유대인들의 음모에 의해 암살 되었다고 믿고 있었고 유대인들에 대해 극도의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 정부의 도움을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인 상황이었다. 미국의 유대인 사회는 엄청난 충격을 받고 현지 피해자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 및 이들의 미국 이민을 도와주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결과적으로 1903년 이후 러시아 제국 출신 유대인의 미국 이민은 폭증을 하게 되는데 1897년 93만명이었던 미국 내 유대인 인구가 1907년에는 180만 명에 육박하고 1910년에는 200만 명을 넘게 된다.  


키시니예프 사건을 통해 유럽 및 미국에 있는 유대인 사회는 이전의 박해 때와는 새로운 차원의 고민을 하게 되는데 우선 자신들이 외부의 폭력에 너무나도 무력했다는 자성이 불거져 나왔다. ‘제브 야보틴스키 (Ze'ev Jabotinsky)’ 같은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보호 하기 위해 자경단 성격의 무장 단체 조직을 주장했다. 이제 유대인들이 자신의 생존은 스스로 지켜야 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더불어 많은 러시아 유대인들이 짜르의 극우 반동정치에 반대하여 사회주의 노선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들은 이후 러시아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또한 유대인 국가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현지에서 오래 전부터 살아왔던 아랍인들과의 본격적인 갈등을 예고하는 것이었다.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정점을 이룬 유대-아랍 세력 간의 갈등은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반유대 폭동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905년 10월 러일 전쟁이 러시아의 패배로 종료 된 직후 러시아인들은 짜르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 했는데 정작 그 목소리는 다시 한번 유대인에게 향했다. 러시아 전역에서 600여건의 포그롬이 발생했고 키시니예프도 예외는 아니었다. 과거와 하나 다른 점이 있었다면 이전 사례에서 교훈을 얻은 유대인 자경단이 반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키시니예프 포그롬은 30년 후에 나치에 의해 시작되는 유대인 박해의 원형으로 볼 수 있다. 그 규모나 정도 면에서는 훨씬 작았지만 인간에 대한 지독한 증오에서 비롯되었다는 본질에서는 홀로코스트와 큰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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