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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Dec 25. 2021

1902년, 마르티니크 몽플레 화산 폭발

20세기 100장의 사진 (1)

화산 폭발로 페허가 된 생 피에르시의 모습

짙푸른 코발트 빛 바다와 이국적 풍경 그리고 해적들의 전설이 녹아있는 카리브해는 세계적인 휴양지로서 그 명성이 드높은 곳이다. 카리브해는 크게 쿠바, 도미니카 등을 연결하는 큰 섬들로 이루어진 ‘대앤틸레스 제도’와 그 밑의 작은 섬들로 남아메리카까지 이어지는 ‘소앤틸레즈 제도’로 구성이 된다. 그 중에서도 대서양을 향해 마치 활처럼 뻗어있는 소앤틸레즈 제도는 과달루페, 세인트 루시아 등 이름은 생소하지만 천혜의 자연을 가진 여러 섬들이 위치해 있는데 그들 중에는 우리가 살펴 보고자 하는 프랑스령 마르티니크섬도 포함 된다. 마르티니크는 소앤틸레즈 제도의 중심지 중 하나로 약 38만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낙원과 같은 해변과 자연 풍광을 배경으로 관광업이 발달한 곳이다. 이 섬의 북쪽 끝에는 ‘몽플레’라는 화산이 위치해 있는데 1,397미터의 높이로서 섬 전체를 평화롭게 내려다 보고 있다. 하지만 1902년 5월에 몽플레 화산은 전혀 평화롭지 않았는데 엄청난 비극을 야기한 주인공으로서 전세계인들을 경악에 빠뜨렸다.     

   

과거 몽펠레 화산은 큰 폭발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18~19세기를 거치면서 크고 작은 수증기들이 여러 차례 분출 되는 등 지속적인 활동이 관찰 되고 있었다. 그러던 1902년 4월 초 산 주변을 오르던 몇몇 사람들에 의해 유황 수증기의 분출이 목격 되었다. 하지만 과거에도 이런 식의 분출은 여러 차례 발생 했기에 그 누구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4월 20일 이후에는 화산재가 섞인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더불어 작은 지진 활동이 감지되었다.  드디어 4월 25일에는 화산재를 동반한 커다란 구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날 이후 화산재를 동반한 구름은 점차 커져 갔지만 여전히 마르티니크 당국 누구도 이에 대한 별도의 안전 조치를 생각하지 않았다. 산 정상에는 일종의 칼데라 호수가 생성되어 있었는데 이곳에서 지속적으로 물이 끓는 것이 관찰 되었고 유황의 냄새가 인근의 ‘생 피에르 (St. Pierre)’시를 뒤 덥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다가오는 재앙의 전조에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말과 가축들이 끊임없이 불안해 하는 등 본능적인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속적인 전조 징후를 보이던 몽플레 화산은 5월 2일 오전에 마치 포효하는 사자처럼 폭발하기 시작했다. 폭발은 엄청난 지진과 화산재를 동반하며 아래로 퍼져 나아갔다. 이런 가운데 산 주변의 거주자들이 아래의 생 피에르시로 몰려 왔고 사람들은 탈출 할 배를 찾아 항구 주변을 배회했다. 생 피에르시는 이미 아비규환그 자체였고 전기도 단절되어 밤에는 그 혼란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시 당국은 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마르티니크의 프랑스 행정관인 ‘루이 무테 (Loius Mouttet)’는 부인과 함께 끝까지 자리에 남아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분투했는데 그의 노력이 하늘에 닿았는지 5월 7일 저녁에는 전반적인 화산 활동이 다소 수그러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실 인근의 세인트 빈센트 섬에서도 5월 6일에 엄청난 화산 폭발이 있었는데 이를 통해 마르티니크 사람들은 몽플레 화산의 압력이 분산되어 폭발이 잦아든 것으로 자의적인 해석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마치 폭풍 전의 고요처럼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마침내 마르티니크 운명의 날인 5월 8일이 되었다.


아침 8시경 갑자기 커다란 굉음과 함께 버섯 구름이 솟아 올랐고 뜨거운 수증기와 결합된 화산쇄설류 등이 엄청난 속도로 생 피에르시를 덮치기 시작했다. 화산재의 속도는 100킬로미터 이상이었고 그 온도는 무려 1,000도에 달했다. 화산재와 수증기 그리고 산의 진흙 등이 뒤섞인 엄청난 덩어리가 도시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고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뭉개고 태워버렸다. 사람들은 자기가 있던 그 자리에서 아무런 저항이나 도망도 못하고 그대로 죽어갔다. 이후 생 피에르시는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히 단절 되었고 행정 수도인 ‘포르드프랑스 (Port de France)’에서는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 지 몰라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엄청난 열기 및 화산재로 인해 근 7시간이 지나서야 구조대가 접근 할 수 있었는데 그들은 모든 것이 휩쓸려 나가고 죽은 자로 가득 찬 생 피에르시의 모습에 전율을 느끼게 된다. 땅에서 계속 나오는 엄청난 열기 때문에 생존자 구조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구조대는 자신들의 안전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었다. 도시는 이후 며칠에 걸쳐 계속 타게 되었는데 생 피에르시의 주민 및 피난민 약 3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산되었다. 화산으로 사라진 고대 로마 시대 폼페이의 재판이었다. 이 와중에 두 명의 생존자가 살아 남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 명은 도시 외곽에 거주자로서 바닷물에 뛰어들었던 사람이었고 다른 명은 환기가 안 되는 지하 감옥에 갇혀있던 죄수였다. 지하 감옥의 폐쇄적인 환경이 외부의 열기를 막아 주었고 이를 통해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이 죄수는 즉시 사면 되었고 이후 서커스단에서 자신의 생존기를 팔면서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마르티니크의 비극을 전해 들은 각 국은 경악했고 프랑스 당국에 즉각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미국은 인근의 자국 함선을 동원해 현지 구호에 투입했고 영국, 독일, 러시아, 일본 등의 나라들이 뒤를 따르며 자금 및 인력을 통한 인도적 지원을 하게 된다. 이후 5월 20일에도 화산이 다시 한 번 분출하며 여러 구호 인원이 희생 되었고 8월 30일에 그 해의 마지막 폭발을 통해 1,000여 명 이상의 희생자가 나게 되었다. 몽플레 화산의 폭발은 활화산의 위험성에 대해 국제적인 공감대를 불러 일으켰고 예방 및 구호 활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의 계기를 마련했다. 오늘날 몽플레 화산은 과거의 비극을 뒤로 한 체 묵묵히 섬 전체를 굽어보며 서 있다. 카리브의 태양 아래 우뚝 서 있는 화산의 아름다운 모습은 그 이면에 숨어있는 자연의 무서움을 상기 시키는 하나의 경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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