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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Dec 06. 2021

1901년, 2차 보어전쟁과 죽음의 수용소

20세기 100장의 사진 (1)

영국의 강제수용소에서 빈사 상태에 놓인 리지 판 자일

1901년 6월 영국 사회는 한 여성의 보고서로 인해 극도의 충격과 혼란에 빠지게 된다. 해당 인물은 ‘에밀리 홉하우스’라고 불리는 영국의 여성 활동가로서 영국과 전쟁 중이었던 남아프리카를 구호 목적으로 방문했던 사람이었다. 당시 영국은 금광 확보 및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이곳의 ‘트랜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의 보어인들 (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계 이민자들)과 ‘2차 보어 전쟁’이라는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미 1880년 ‘1차 보어 전쟁’에서 보어인들의 게릴라전에 제대로 당하며 패배한 영국군은 ‘카르툼 정복자’인 키치너 장군의 지시에 따라 ‘초토화 정책’을 실시한다. 이는 보어인들의 거주 및 보급 기반을 제거하여 이들의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 시키려 한 것이었다. 더불어 집에 남아있던 보어인 부녀자와 유소년들을 캔버스 텐트로 만든 임시 수용소에 강제로 가두게 되었는데 홉하우스는 바로 이 강제수용소를 방문하고 그 곳의 상황을 보고서로 적은 것이었다.


그녀가 목격했던 수용소의 상황은 지옥 그 자체였다. 대부분의 수용소들이 가장 기본적인 식수 및 위생시설이 부족하거나 사실상 전무했고 충분치 않은 음식에는 파리와 각 종 병균들이 가득했다. 좁은 텐트에는 10~12명의 인원들이 포개어지듯 들어 갔는데 낮에는 작열하는 태양 속에 질식해 죽을 것 같았고 밤에는 텐트에 젖은 이슬이 그대로 내부로 떨어지며 축축하고 병균이 번성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인은 물론 어린이들이 영양실조, 페렴, 이질 그리고 티푸스 등으로 대량으로 죽어갔다. 그녀가 가장 충격을 받았던 ‘블룸폰테인 수용소’에서는 하루 50명의 비율로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홉하우스는 이곳에서 거의 해골 상태가 되어 죽어 가고 있던 ‘리지 판 자일 (Lizzie van Zyl)’을 보게 되었다.  판 자일은 당시 7세의 어린 소녀였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보어군으로서 항복하기를 거부함에 따라 최저 배급량을 받으며 극심한 영양실조에 걸려 있었다. 판 자일을 비롯한 비참한 어린이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홉하우스는 이곳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보고서를 작성하고 이를 영국 언론 및 대중에게 전파하려 노력한다. 그녀의 보고서는 영국 및 국제 사회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특히, 영국 내에서는 로이드 조지 등의 자유당 계열 정치인들이 정부를 극렬하게 비난하게 되고 이에 많은 사람들이 동조한다.


처음에는 홉하우스를 ‘적을 이롭게 하는 자’로 비난하며 사태 해결에 미온적이던 영국 정부도 증가하는 대중 및 국제사회의 압력에 굴복하게 된다. 영국 정부는 현지의 키치너경에게 보고서를 작성토록 하는데 1901년 8월에 나온 그 결과는 9만 3천명 이상의 보어인들이 강제로 수용되어 있고 상황이 재난이 되어 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홉하우스의 최악의 우려가 확인 되는 순간이었다. 사태에 대한 대중의 항의는 더욱 거세졌고 결국 여성 참정권자인 ‘밀리센트 포셋’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 위원회가 구성 된다.

 ‘포셋 위원회’는 4개월 에 걸친 조사를 통해 위생 및 영양 공급에 대한 개선을 촉구하는 장문의 보고서를 제출하게 된다. 이러한 영향으로 조사가 거의 완료되어 가던 11월에 식민지 장관인 ‘조셉 체임벌린’은 보어인 수용자의 사망률을 줄이기 위한 모든 대책을 강구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되었고 이 때부터 사망자수가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많은 수의 보어인 수용자들이 이미 사망한 후였는데 최종적으로 전체 수용자의 25% 가량인 2만 8천여 명 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 된다.


에밀리 홉하우스는 그녀의 보고서 발간 이후 다시 남아프리카로 들어가려 했으나 심기가 불편했던 영국 정부에 의해 상륙을 거부 당하게 되고 추방 당한다. 1902년 5월에 마침내 2차 보어 전쟁이 끝나게 되고 홉하우스는 다시 남아프리카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녀는 삶의 터전을 잃고 어려운 상황에 놓인 보어인 부녀자들의 자활 및 자립을 돕는 일을 계속 하게 되었고 이후에도 반전 평화운동가로 활동하다가 1926년에 사망하게 된다. 그녀는 헌신적으로 박애주의를 실천한 공로를 인정 받았고 남아프리카의 명예 시민이 되었다.


한편 승리한 영국은 이겼지만 이긴 것이 아닌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영국군은 무려 45만 명의 인원을 투입했는데 대부분이 농부 출신인 7만 명의 보어인들을 간신히 제압했고 쇠락하는 자국의 국력에 많은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당혹감은 ‘그레이트 게임’을 통해 러시아와 대립하던 상황에서 일본 이라는 새로운 동맹 파트너를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보어인 강제수용소를 통해 국제적인 악명을 얻게 되었고 ‘민주주의와 신사의 나라’인 영국에서 이러한 잔인한 시스템이 최초로 발생했다는 것은 이후 많은 타국 사람들에게 반영 정서를 일으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나치 독일은 1941년에 이 당시 영국인의 만행을 그린 선전영화 ‘크뤼거 아저씨’ (당시 트랜스발 공화국의 대통령 파울 크루거를 주인공으로 함)를 제작 했는데 자신들은 이 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악랄한 수용소를 운영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위선적인 나치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 회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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