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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Mar 05. 2022

1905년, 포츠머스 강화조약

20세기 100장의 사진 (1)

포츠머스 강화조약 당시 러시아와 일본 대표단

20세기초의 포츠머스는 미국 동북부 뉴햄프셔주에 위치한 군항이자 아름다운 별장들이 대서양을 따라 늘어선 한적한 곳이었다. 1905년 8월 이곳에는 정장을 입은 한 무리의 낮 선 아시아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매일 같이 숙소인 ‘웬트워스 호텔’에서 배를 타고 인근 메인주 키터니의 해군조선소까지 이동 했는데 그 곳에는 또 다른 무리의 외국인들이 목격 되었다. 아시아인들은 바로 일본의 외교관들이었고 다른 외국인들은 러시아 측 대표단이었다. 이들은 자국에서 멀리 떨어진 미국 땅 포츠머스에서 엄청난 희생과 전비가 소요된 한 전쟁을 끝내려고 모였는데 그 전쟁은 바로 1차세계대전 이전 최대 규모의 희생을 야기했던 ‘러일전쟁’이었다.


러일전쟁은 1904년 2월 러시아가 점유하고 있던 청나라의 뤼순항에 대한 일본군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 다. 당시 유라시아 대륙은 따뜻한 남쪽의 부동항을 차지 하려는 러시아 제국과 이를 견제 하려는 대영제국의 소위 ‘그레이트 게임 (Great game)’이 그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러시아를 견제할 우방을 찾던 영국은 청나라를 물리치고 지역 맹주로서 발돋움 하는 일본을 주목하게 되었고 1902년 영일 동맹을 맺었다. 당시 일본은 조선 및 만주로의 진출을 통한 자국의 확장을 추구 했는데 영일 동맹을 통해 든든한 우방국을 얻게 되었고 잠재적 적인 러시아를 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기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오게 된다.


일본은 뤼순항을 기습함으로서 러시아 요새인 ‘포트 아르투르’를 신속히 점령하려 했지만 강력한 러시아군의 기관총좌와 대구경포의 화력에 막혀 엄청난 희생을 강요당했다. 하지만 끈질기게 반복되는 일본군의 공격 속에 포위된 러시아군의 사기는 날로 저하되었고 결국 1905년 1월에 뤼순항의 러시아군은 일본군에 항복하게 된다. 이후 3월의 ‘봉천대회전’과 5월의 ‘쓰시마 해전’에서마저 승리한 일본군이 완전한 전쟁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러시아는 설상가상으로 전쟁에 대한 강한 반대와 국민적 불만이 혁명 수준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승기를 잡은 일본이 마냥 유리한 상황 만은 아니었다. 전쟁으로 인해 국채를 마구 발행한 일본은 엄청난 재정 압박에 시달렸고 거의 한계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더 이상 전쟁을 끌고 가기에는 양 측 공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시 일본 외무장관인 고무라 주타로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제 막 '먼로주의'를 벗어나서 국제적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미국에 주목하게 된다. 미국 정부를 통해 러시아에 영향력을 미쳐 회담장에 나오도록 하자는 계산이었다. 동양의 작은 나라 따위는 쉽게 이길 것이라 생각했던 러시아도 일련의 패배와 내부의 불안 상황을 보며 출구 전략을 모색하게 되었고 결국 회담장에 나오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양국 대표단들은 뜨거운 수도 워싱턴의 여름 더위를 피해서 서늘한 북쪽에 위치한 포츠머스에 모이게 된 것이다. 일본 측은 외무장관인 ‘고무라 주타로’가 이끌었고 러시아 측은 재무장관 출신이자 관록 있는 협상가인 ‘세르게이 비테’가 대표로 나왔다.  양국은 8월 9일부터 20일에 걸쳐 전쟁을 종결 시키기 위한 협상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총 12개의 안건이 협의 되었는데 즉각적인 종전이나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 강화 등 8개 안은 순조롭게 합의 되었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전쟁배상금과 양 국간의 영토 조정 문제였다. 양측은 난항을 거듭했는데 회담을 결렬시키고 철수 하겠다는 러시아의 반협박에 조급했던 일본이 양보 함으로서 합의를 이끌어 내게 되었다. 결국 러시아 땅인 사할린섬의 남부를 일본이 차지하고 러시아는 전쟁배상금을 지불하지 않는 것으로 타협 되었는데 전쟁에 진 러시아로서는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키게 되었다.  

9월 5일 양측은 일본 대표단이 묶었던 웬트워스 호텔에서 강화 조약을 맺는다.

 1853년 페리 제독에 의해 강제 개항된 아시아의 작은 나라 일본이 본격적인 열강이자 제국으로 발돋움 하는 순간이었다. 러시아는 국내의 정세 불안을 이유로 전쟁을 빨리 종결하려 한다고 대외에 선전 했지만 최초로 유색인종에게 패배한 유럽 국가라는 낙인이 찍혔고 군사대국으로서 자존심을 여지없이 구기게 되었다. 더불어 국내에는 혁명에 준하는 반란 및 소요가 연이어 발생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훗날 러시아 혁명으로 가는 시발점이 되었다. 한편 일본은 그 침략 야욕을 더 이상 숨기려 하지 않았다. 곧장 랴오둥 반도 및 만주에 있는 러시아 이권을 접수하였고 11월 17일에는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맺으며 완전한 식민 지배에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한편, 회담을 주선한 미국은 국제 사회에서 그 영향력을 확대 할 수 있었다. 이미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해 필리핀, 푸에르토 리코와 쿠바를 빼앗으며 제국주의의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포츠머스 조약을 중재하며 보다 세련되고 전략적인 모습으로 국제 무대에 각인 되었다. 더불어 회담장에는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던 ‘테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듬 해인 1906년에 러일전쟁의 종식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포츠머스 강화조약은 이후 30년간 지속된 아시아, 태평양 지역 내 국제 질서의 청사진이 되었다. 일본은 이러한 청사진 하에서 자신의 이익과 영토를 극대화 하지만 끊임없는 팽창은 영국, 미국 등 기득권을 가진 서구 국가들에게 위협이 되었고 결국은 대결로 치닫게 된다. 1905년의 포츠머스는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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