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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Mar 07. 2022

1907년, '베이징-파리' 대륙횡단 레이스

20세기 100장의 사진 (1)

베를린에서 환영을 받는 보르게스 (가운데)와 바르지니 (우측 3번째)

산업혁명 이후 등장한 수많은 문명의 이기 중 자동차는 단연 최고의 발명품이라 할 수 있다. 자동차를 통해 인간은 이동의 한계를 넘는 다양한 활동이 가능해졌다. 이 획기적인 기계는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고 각종 산업이 성장 할 수 있게 하는 기폭제 역할을 해왔다. 1886년 독일의 칼 벤츠 (Karl Benz)가 내연기관이 장착된 자동차를 발명한 이후 20세기 초 유럽과 미국에는 수백 개의 자동차 회사 및 모델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1900년대 초만해도 자동차는 부유층의 전유물이거나 스포츠 용도의 특수한 기계 정도의 인식이 강했는데 이러한 대중의 인식도 자동차 보급이 점차 증가 함에 따라 바뀌어 가고 있는 과정 이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프랑스의 유명 신문인 ‘르마탱’ (Le matin: 프랑스어로 아침)지는 자동차라는 기계의 한계를 뛰어넘는 상상 이상의 이벤트를 기획하게 되는데 바로 자동차를 통해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한다는 구상이었다.


르마탱지는 1907년 1월 31일자 기사를 통해 “인간은 자동차를 통해 원하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전제를 시작으로 “이번 여름에 중국의 베이징에서 프랑스 파리까지 대륙횡단 자동차 레이스에 도전 할 사람을 찾는다!”는 일견 무모해 보이는 내용을 싣게 된다. 르마탱지의 도발적 질문에 최종 40명의 다양한 사람들이 참가 의사를 타진했다. 하지만 이들의 출발점은 파리가 아닌 머나먼 극동의 중국 베이징이었고 자동차를 현지로 이동 시키는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며 최종적으로 대회 참가를 강행한 팀은 불과 5팀 이었다. 르마탱은 저조한 참가 인원을 두고 대회 실시 여부를 고민 했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상황이었다. 이렇게 해서 세계 최초의 ‘대륙횡단 자동차 레이스’가 시작된다.


레이스는 1907년 6월 10일 8시에 베이징의 프랑스 대사관 앞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태의 레이스가 처음이라 따로 경기의 규칙은 없었고 먼저 파리에 가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었다. 연료 보급은 낙타로 가솔린을 이동 시키면서 공급하는 것으로 진행 되었다. 주요 코스는 몽골의 울란바토르, 고비 사막,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와 옴스크를 거쳐 러시아의 심장인 모스크바와 당시 러시아 영토였던 폴란드의 바르샤바, 그리고 독일의 베를린을 거쳐 최종적으로 파리로 이어지는 총 16,000km의 초장거리 경로였다. 해당 경로는 신속한 기사 전달을 위해 전신 송신이 가능한 지역 거점을 통과하도록 세심히 배려 되었다. 각 참가자는 언론사의 기자 일인 씩을 동행하게 되는데 이들은 참가자들의 생생한 느낌과 목소리를 전세계에 타전 할 예정 이었다.


6월 10일 오전 8시, 마침내 프랑스 대사관에서 경기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울리게 되고 5인의 참가자들은 두 달 간의 장도에 오르게 된다. 참가자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이탈리아를 대표해서 나온 ‘스키피오네 보르게스’였는데, 그는 유명 귀족가문 출신으로 정치가, 외교관, 탐험가, 산악 등반가 등 다양한 이력을 가진 국제적 명사였다. 그는 이미 아시아와 중국을 횡단한 경험이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레이스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그의 차는 이탈리아제 ‘이탈라 (Italla) 35/45 HP’로서 7,433cc 엔진으로 최대 속도 95km를 자랑했다. 이 차는 당시의 일반 차량과는 다르게 4륜 모두를 동일한 크기의 타이어로 장착했고 이로서 소모품의 적재를 최소화 할 수 있었다. 보르게스는 리터 당 3km 이하의 연비를 보이는 저조한 당시 차량의 성능을 감안하여 세심하게 연료 보급 계획을 짰다. 그는 이탈리아의 대표적 신문사인 ‘코레에레 델라 세라(Corriere della Sera)’ 소속의 루이지 바르지니와 동행했는데 레이스 후에 바르지니는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동차에서 본 세계의 절반”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다른 4대는 프랑스제 ‘드 디옹 (De Dion)’ 모델이 2대, 역시 프랑스제인 ‘콩탈 (Contal) 3륜차가 한 대 그리고 네덜란드제 ‘스파이커 (Spyker) 모델이 한 대였다. 첫날부터 선두에는 철저한 준비와 현지 분석을 한 보르게스의 이탈리아팀이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이 중간 중간의 기착지에 도착하면 동행한 언론인들은 전보로서 중간 소식을 보냈고 유럽의 독자들은 이들의 모험에 열광했다. 레이스가 고비 사막을 지날 때 프랑스팀 중 하나인 콩탈 차량은 모레에 차가 빠져 더 이상 전진 할 수 없었는데 다행히도 현지인들에게 발견되어 생환 할 수 있었다. 남은 4개의 팀은 시베리아를 거쳐 모스크바로 향했는데 가는 도중에 온갖 자연 지물에 어려움을 겪었고 망가진 부품은 임시로 제작 하는 등 다양한 현지 주민들의 도움으로 레이스를 이어 갔다. 이들 현지인들은 거의 전부가 자동차를 처음 본 사람들이었고 레이스팀 일행을 경이로운 눈빛으로 쳐다 보았다고 한다.


이들 일행이 모스크바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여러 소문들이 퍼졌고 도시의 다양한 고위직부터 자동차 동호회원들 및 외교 사절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환영하기 위해 나왔다. 여성들은 지나가는 차에 꽃을 던졌다고 한다. 모스크바에서 요란한 환영을 받은 일행은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그로 향했다. 원래 이 도시는 여정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먼 길을 달려온 모험가들을 환대하기 위한 현지인들의 요구와 레이스를 보다 흥미롭게 끌고 가기 위한 주최 측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며 여정에 추가 되었다.


러시아를 지난 레이스가 독일에서 펼쳐 지면서 모든 것이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러시아의 대자연과 비교하여 월등히 양호한 독일의 도로 상황이 이를 가능케 했다. 베를린에서도 러시아 못지 않은 환영 행사가 펼쳐졌다. 이들은 이미 국제적인 유명인사였고 사람들은 저마다 환호성을 지르며 열광하고 있었다. 8월 10일 보르게스의 이탈리아팀이 마침내 1위로 파리에 입성 하면서 레이스는 막을 내렸다. 2위는 네덜란드의 스파이커팀이었다. 자국 팀이 1위를 못했음에도 파리 시민들은 “보르게스 만세!”를 연호하며 이들을 환영했다. 이렇게 자동차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 준 이벤트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헨리 포드가 대량 생산 방식을 도입 하고 제네럴 모터스가 다양한 포지셔닝을 통해 제품군을 확장 하면서 자동차 산업은 무한대로 성장하게 되었다. 지금이야 비행기로 몇 시간 만에 간단히 이동하는 거리 이지만 1907년의 사람들에게 지구 반 바퀴를 자동차로 여행 한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모험과 낭만을 자극하는 일대 사건이었고 그 개척자들은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기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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