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는 인간이 만든 가장 놀라운 발명품 중 하나이다. 종이는 우리의 다양한 생각을 정리하고 세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을 기록할 수 있게 해준다. 종이를 통해 과거의 많은 업적과 작품들이 후세에 전승 될 수 있었고 인류는 더욱 발전 할 수 있었다. 때로 종이는 상기한 역할 이상의 엄청난 의미를 가질 수도 있는데 1917년 11월 2일에 작성된 종이 한 장이 바로 그러한 것에 속했다. 그 한 장의 종이는 지극히 건조한 문체로 쓰여진 한 장의 공식 레터였는데 그 내용이 함축하는 폭발적인 의미를 담기에는 너무나도 단순해 보였다. 레터의 발신인은 당시 대영제국 외무장관이었던 ‘아서 밸푸어 경’이었고 수신인은 전직 의원이자 영국 內 유대인 단체의 수장인 ‘월터 로스차일드’였다. 도대체 그 레터 한 장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던 것일까?
19세기 말의 유럽은 러시아의 대대적인 포그롬 (유대인 박해)과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으로 대표되는 반유대주의 감정이 상존하는 곳이었다. 오스트리아 비인 출신의 유대인 언론인 ‘테어도어 헤르츨’은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고민하게 되고 결국 ‘유대인 국가’의 건설 만이 유일한 대안 임을 강조하는 ‘시온주의’를 주창한다. 당시 포그롬을 피해 몰려드는 유대인 난민으로 고민하던 영국은 영국령 동아프리카 (현재의 우간다)에 유대인 정착지를 마련하는 방안을 국제 유대인 단체에 제시했으나 유대인들은 이를 완곡히 거절한다. 예루살렘이 있는 팔레스타인 땅이 아니면 그들에게 다른 곳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은 당시 영국이 아닌 ‘오스만 터키’의 지배 하에 있었는데 대부분이 아랍인인 거주자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대인 국가 건설의 꿈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1914년 7월 1차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오스만 터키와 영국이 서로 적국이 되면서 상황이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우선 영국은 중동 지역에 있는 터키 지배 하의 아랍인들을 구슬리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무장 반란을 일으켜 터키에 대항하고 영국군의 전쟁 수행에 도움을 준다면 해당 지역에 아랍인들의 독립된 국가를 세우도록 지원 해준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약속이 당시 메카의 지도자인 ‘후세인 빈 알리’와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이었던 ‘헨리 맥마흔’ 사이에 서면으로 교환 되었고 후세인-맥마흔 서한 (선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냉혹한 국제정치는 영국으로 하여금 전혀 다른 길을 가게 한다. 1916년 5월에 영국은 프랑스, 러시아와 함께 비밀리에 ‘사이크스-피코’ 조약을 맺고 전후 중동을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권으로 양분 할 것을 계획한다. ‘신사의 나라’는 처음부터 양이나 키우고 있던 아랍인들에게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한편 전쟁은 더욱 격화되고 있었는데 1916년 중반을 넘어가면서 대영제국의 전쟁 수행 능력은 거의 한계에 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유대인들이 영국에게 중요한 전쟁 수행의 보조자이자 압력단체로서 부상하게 되는데 특히 두 사람이 핵심 인물로서 주목받게 된다.
첫 번째 인물인 유대인 화학자 ‘하임 바이츠만’은 러시아 출신으로 스위스 제네바 대학교에서 수학했고 1904년부터 영국 멘체스터에 이주하여 화학 교수로서 활동했다. 1910년에 영국 시민권을 딴 그는 영국의 전쟁 수행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기여를 했는데 화약 제조에 사용되는 아세톤을 대량생산하는 방법을 개발한 것이다. 이전까지 아세톤은 목초를 통해 추출 되었는데 그의 연구를 통해 증류소에서 대량 공급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이것은 영국의 포탄 제조 및 전쟁 수행에 지대한 이점이 되었는데 이후 바이츠만은 영국 정부 및 내각에 대해 큰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었다. 더불어 그는 골수 시온주의자였는데 영국 내지인들 및 정책 결정자들에게 유대인들이 영국의 전쟁 수행에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설파하였다. 그는 훗날 이스라엘 건국 시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두 번째 인물인 ‘월터 로스차일드’ 남작은 그 유명한 금융 재벌인 ‘로스차일드 가문’ 출신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의 모든 전쟁과 식민지 경영에 금융 지원을 했는데 로스차일드를 빼고 대영제국을 논 할 수 없었다. 월터 로스차일드는 영국의 보수당 의원을 지냈고 동물학자 및 자선사업가로서 집안의 막대한 부를 선한 용도에 쓰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그는 유대인으로서 시온주의에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유럽의 다른 로스차일드 가문 친척들과 함께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정착을 지원하였다. 이들 두 사람은 아서 벨푸어, 로이드 조지 등 영국 내각의 핵심 정치가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유대인 국가 건설을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1916년 12월에 친유대적인 로이드 조지가 수상이 되었고 이후 영국 정부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1917년 6월 경이 되자 영국 정부의 입장은 유대인 국가 건설을 찬성하는 쪽으로 입장이 정해졌다. 외무장관인 아서 벨푸어는 바이츠만과 로스차일드에게 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토록 요청한다. 수많은 작업, 논의와 수정을 거치면서 레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레터는 대단히 민감한 내용을 포함한 만큼 용어 선정에 신중을 기하며 작성 되었는데 직접적인 ‘유대인 국가 (Jewish state)’라는 표현을 쓰는 대신 ‘유대민족의 국가적 안식처’ (National home for the Jewish people)라는 다소 모호하고 완화된 표현을 사용했다. 또한, 팔레스타인 내에서 (In Palestine)라는 표현을 사용 함으로서 유대 국가의 영역이 팔레스타인 전체가 아닌 팔레스타인 내의 일부 지역을 뜻하는 것처럼 해석 될 여지를 남겼다. 이러한 것들이 후대에 논란 거리가 되며 분쟁의 씨가 된다. 한편, 영국 정부는 미국, 프랑스 등 연합국에게 해당 내용에 대한 사전 동의를 구했고 마침내 1917년 11월 2일 월터 로스차일드의 집으로 해당 레터가 발송 되었다. 언론에는 일주일 후인 11월 9일에 공식적으로 발표 된다.
해당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자 전세계의 유대인 사회는 당연히 환영 일색이었다. 한편, 아랍 세계의 지도자들은 영국의 배신 행위에 치를 떨었고 특히, 아랍인들이 90% 이상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땅의 거주자들은 분노를 넘어 자신들의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한 달 후인 12월 9일에 영국군이 예루살렘을 점령 하면서 유대인들의 기대는 한껏 고조 되지만 이듬 해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영국의 입장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국가 건설에 목숨을 건 유대인들에게는 더 이상 복잡할 것이 없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이주를 가속화하고 영국에 지속적인 압력을 넣은 동시에 2차대전 시에는 히틀러에 대항하여 영국을 적극 지원한다. 결국 1948년 5월 14일에 유대 국가인 이스라엘이 수립되고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생존한 유대인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안식처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에게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기나긴 고난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이 1917년 11월의 한 통의 레터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