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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Jul 06. 2023

건조체 글쟁이의 삐딱한 세상-꼴통

102. 포기하지 마

  옛날 중국 노나라에 “미생”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정직하고 순박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는 한 여인을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날짜가 된 그는 시간에 맞춰 장소로 나가 여인을 기다렸다. 하지만 여인은 제 시간에 나오지 않았다. 그런 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다리밑 개울이 물에 차올랐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그런데도 미생은 약속 장소에서 떠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여인이 올 것이라는 생각에. 그러나 여인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미생은 불어난 물에 결국 빠져 죽고 말았다.



                                   -미생지신-

     답답할 정도로 우직하고 고지식한 사람을 가리킴.



  중국에 전해 내려오는 병법 중 36계라는 게 있다. 쉽게 뜻풀이를 해보자면 전쟁 중 적용할 수 있는 계책이 36가지라는 것인데, 이는 말 그대로 전쟁을 치르는 병법에는 한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는 말일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36계를 줄행랑과 합쳐, ”36계 줄행랑“이라고들 말한다. 사실 36계에는 줄행랑이라는 병법은 없다고 한다. 36계의 마지막 계책인 “주의상”이라는 병법이 “전황을 잘 읽어 도망치는 것“과 비슷한 의미를 지녀 우리나라의 “줄행랑을 놓다(행랑이 줄지어 있는 부유했던 집이 가세가 기울어 더 이상 유지 할 수 없게 되어 도망을 치는 것이라는 뜻)“가, ”낌새를 채고 피하여 달아나다 “라는 뜻으로 와전되어 이 36계 병법과 합쳐져, 36계 줄행랑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한 마디로 이 36계 줄행랑은,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도망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다 포기하지 마. 또 다른 모습에, 나 살기 위해 몸부림 치는 걸”



  이건 90년대 인기를 끌었던 “포기하지 마”라는 제목의 노래 가사 일부분이다. 물론 여기에서의  “포기”란 삶과 인생에서의 포기가 아닌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의미이기는 하다. 아무리 힘든 사랑이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거라는 희망의 함축된 의미를 가지고서 말이다. (참고로, 요즘 저런다면 그건 영락없이 스토커로 오해 받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결코 짧다 할 수 없는 인생을 살면서 노래 가사와 같은 사랑을 비롯해 그 외에도 실로 많은 일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때 우리는 어떤 일들에 대해서 포기를 해야 할지 아니면 계속 밀고 나가야 할지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된다. 그리고 이때 그 결정에 대해 확실한 믿음이 잡히지 않아 갈팡질팡 하게 되면 주위 사람들은 흔히 앞에서 언급한 노래 가사처럼 “포기하지 마”라는 말로 조언을 던져 준다. 마치 옛날 권투선수 홍수환이, 한 라운드에 4번 다운당하고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다음 라운드에 상대를 KO 시켜 역전승을 거두어 두 눈두덩이 찢어지고 퉁퉁부은 채 카메라를 향해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 말했던 전설과도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처럼 말이다.



  요즘 일반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주로 다루는 미디어 매체에는, 인생의 고비에서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결국 성공적인 삶을 이룩한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좌절의 순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텼기에 지금처럼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건 당연할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극적인 것을 좋아해 그런 유형의 사람들만 취재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빠른 판단으로 신속하게 포기하고 다른 일을 택해 성공한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라는 게 내 추측이다. 다만 그러한 사람들은 강력한 임팩트가 없다는 이유로 취재 거리가 되지 않아 방송으로 노출되지 않을 뿐인 것이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포기라는 말에 유난히 민감하다. 포기를 하면 마치 인생의 실패자 또는 낙오자로 낙인찍히는 주홍글씨처럼 죄의식을 갖는다. 하지만 포기라는 것이 그렇게 생각할 만큼 꼭 나쁜 것인가. 상황에 따라서는 일찍 포기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 될 수 도 있을 텐데.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포기라는 단어를 터부시 하는 가.



   우리는, 주변 사람들이 상황과 여건에 따라 또는 어떤 일에 지쳐 포기라도 할라치면 마치 혐오스러운 짐승이라도 보듯, 그 일은 일찍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 대신 어김없이 포기하지 말라는 말로 충고한다. 그런데 이때 우리는 입에 발린 듯 구태의연하게 읊조리는 우리의 조언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 까.  과연 그것이 최선이고 틀림없는 정답임이 확실한 것인지를.



  15년 전쯤의 일이다. 내가 소방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때였다. 응시생들이 온라인으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소통할 수 있는 카페에 글 하나가 올라왔다. 글쓴이는 지금 3년째 공부 중으로 주말은 물론 추석과 설날 명절 당일날 까지도 쉬지 않고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필기시험 성적이 합격은커녕 합격선에도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대로 계속 공부를 해야 할지 아니면 그만두고 다른 진로를 택해야 할지 고민 중으로 조언을 구한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나는 그 글을 읽고 한 참을 생각에 잠겼다. 명절 당일날까지도 쉬지 않고 공부를 했다는 게 계속 마음에 남았다. 당시 소방직은 행정직이나 여타 직력보다 필기시험 합격선이 낮을 때였다. 행정직도 보통 3년이면 합격선까지 올라간다고 보는데 소방직이 3년, 그것도 명절조차 쉬지 않고 공부한 것을 생각하면 이 일은 실로 난감한 것이었다. 나는 고민 끝에 댓글로 빨리 다른 진로를 생각해 보라고 권유하고 싶었다. 이 정도면 포기하는 게 맞다고. 하지만 나는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가 정말 포기하려고 그런 글을 쓴 것이 아니라 그저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로를 받고자 한 행위일 것이기에 말이다. 그리고 만약 그때 그의 글에 나의 이런 생각을 가감 없이 댓글로 남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뭇사람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 이후 나는 그때 그 사람이 소방직 시험에 합격을 했는지 못했는지를 모른다. 그러나 설사 그가 그때 포기하지 않고 합격을 했다 하더라도 당시로 돌아간다면, 포기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라고 조언해 주려던 나의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어떠한 일에 있어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부닥쳐 이겨 내는 인간의 모습은 아름답다. 많은 좌절의 순간과 그때마다 찾아오는 포기의 유혹을 물리치고 결국에는 성공해 내는 모습은 인간으로서는 참으로 거부하기 힘든 달코함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럴 수는 없다. 우리 사회의 일들에는 태생적으로나 천성적으로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들도 많다. 그리고 발 빠른 포기로 다른 일을 택해 성공한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고. 그러니 이제 포기하라라는 말을 금기시하지도 말고 7전 8기의 홍수환처럼 내가 끝까지 해내지 못하고 중간에 주저 않았다고 너무 죄의식에 사로 잡히지도 말자. 포기가 실패는 아니다. 미생처럼 물이 불어 오르는데도 미련하게 가다리는 고지식한 사람이 되지도 말고 때에 따라서는 36계 줄행랑을 치는 상황판단도 하면서 말이다. 우리의 인생에는 한 방향만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하기에 따라서 더 다채롭고 무궁한 삶들이 펼쳐질 수도 있을 것이니……


2022.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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