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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Jul 20. 2023

건조체 글쟁이의 삐딱한 세상-꼴통

47. 사극

용의 눈물, 태조 왕건, 대조영, 대장금. 제목만 들어도 누구나 알 법한 드라마들입니다. 이 드라마들은 우리나라 대표 사극으로 방영당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많은 시청자들을 브라운관 앞으로 끌어들였습니다. 특히 대장금 같은 경우는 해외에서까지 큰 인기를 얻으며 우리나라 사극의 위상을 한층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었고요.



물론 위에서 언급한 사극들 외에도 여인천하와 명성황후, 왕이 된 남자 광해나 관상 등 TV나 영화를 통해 제작 방영된 우리나라의 사극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조차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사극은 말 그대로 역사에 있었던 사실을 한 편의 극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나라에 제작 방영되는 사극의 시대적 배경은 대부분 근대 이전의 왕조 시대가 바탕이 됩니다.



   왕조 시대는 말 그대로 왕의 말이 절대적 법이었던 시대입니다. 그의 말 한마디에 누군가는 목숨을 잃고 또 누군가는 엄청난 부를 누릴 수도 있었던 것이죠. 그것이 천하의 패권을 쥔 절대권력의 왕조시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방영되는 사극의 포맷 대부분은 고난에 빠진 주인공이 역경을 헤쳐 나가는 것으로, 이때 주인공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면 결정적인 순간 왕이 “짠”하고 나타나 모든 걸 해결해 주는 것들입니다.



   이런 드라마 속 왕의 능력 때문인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직도 현대의 대통령을 사극에 등장하는 절대권력의 왕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슨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면 사극 속 왕들이 그러는 것처럼 대통령이 “짠”하고 나타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드라마든 영화든 우리가 눈으로 보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사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스개 소리 같지만 드라마에서 악역으로 출연한 배우들이 진짜 그런 나쁜 사람으로 착각한 시민들에 의해 봉변을 당한 일화도 적지 않았고요.



   저 또한 드라마에 감정 이입되어 허구를 사실로 받아들였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사고력이 완성된 성인조차도 이 모양인데 청소년들이나 어린이들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들이 본 어린 시절 각색된 역사 드라마 한 편이 평생 그 역사의 사실들을 진실로 받아들여 살아가야 하는 일이 생겨 버리는 것입니다.



   일례로, 옛날 MBC방송국에서 조선의 500년 역사를 다룬 “조선왕조 500년”이라는 드라마를 만들어 방송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동의보감을 편찬자 “허준”의 삶을 연출한 PD가 한 토쇼에 출연해 작품 제작의 일화를 이야기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허준이라는 드라마의 이야기 90%가 허구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허준에 관한 펙트는 실록에 “허준이 동의보감을 찬하다”라는 한 줄이 다였기에 극 중 허준에 대한 일대기의 이야기 대부분을 허구로 지어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그 드라마를 본 우리는 어떠했습니까. 유의태라는 사람이 허준의 스승이고 허준이 스승의 시신을 동굴에서 해부했다는 픽션을 마치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느냐 말입니다.



   어느 날 친구 한 명이 제게 대통령을 바꾸어 놓아도 별로 달라지는 게 없다는 불평을 놓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친구에게, 아무리 대통령제 중심의 국가라고는 하지만 삼권분립의 국가에서 대통령 한 명 바뀌었다고 세상이 달라지면 그게 잘 못된 세상인 거라고 말했습니다.



   대통령은 그냥 국내의 행정과 외국과의 비준이나 조약등을 책임지는 행정부의 수반일 뿐 민주 공화제 국가에서 대통령이 옛날 군주제의 왕처럼 전권을 휘둘러 바뀌는 세상이라면 그게 봉건 왕조시대와 다를 게 무엇이란 말입니까.



   우리나라는 민주 공화제 국가입니다. 이 말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더 이상 혼자만의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왕이 나라의 주인이었던 봉건 시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뇌는 한 번 각인된 개념을 쉽사리 바꾸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 배우게 되는 교육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고요. 그런 이유들로 저는 요즘, 극의 흥미를 위해 왕의 능력이 미화된 사극의 방송을 이제는 지양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펙트와 픽션 사이에서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오로지 재미를 위해 각색된 드라마가 우리의 의식에 이와 같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사극의 방영에 신중을 기해야 함은 분명한 것일 테니까요.



   마지막으로 이유야 어찌 됐던 조선이 망하고 왕이 없어진 지가 100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왕이 주인이 아닌 국민이 국가의 주인인 공화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주권재민의 시대에 아직도 대통령을 전근대 시대의 왕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사극. 저는 그렇기에 사극 방영의 폐지를 통해, 그저 행정부의 수반일 뿐인 현시대의 대통령을 마치 말 한마디로 세상을 바꾸어 버리는 그 옛날 전지전능한 제왕으로 착각하는 일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021.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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