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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Jul 22. 2023

건조체 글쟁이의 삐딱한 세상-꼴통

55. 제도시행의 유예

   몇 년 전. 옛날의 지번 체계였던 주소를 도로명 주소로 바꾸는 일을 시행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던 지번 주소가 오래되고 체계적이지 못해 현시대에 맞게끔 정비해 시민들의 불편을 해소하고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 제도는 시행도 하기 전에 많은 잡음이 따랐습니다. “멀쩡히 잘 쓰고 있는 주소를 왜 바꾸느냐” “갑자기 이렇게 주소를 바꾸면 어떻게 하느냐”라며 말입니다. 기존 주소의 사용에 젖어 있던 사람들은 새로운 주소로 바꾸면 많은 혼란과 함께 시민들의 불편이 상당할 것이며, 별문제 없이 사용하고 있는 주소를 굳이 왜 바꾸려 하는지 제도의 변경을 영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렇게 시민들의 반발이 이어지자 정부는 논의를 거쳐 제도의 연착륙과 함께 시민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1년 동안 제도시행을 유예하는 걸로 의견을 모아 사건을 일단락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유예된 도로명 주소는 일 년의 시간을 보낸 후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원활한 시행을 위해 1년 동안 유예기간을 둔 이 제도가 1년이 지나 본격적으로 시행되어도 정작 그 혼란은 유예하기 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현장에서 부딪히는 사람들의 혼선은 여전했고 행정 기관과 시민들 모두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딱히 별다른 조처 없이 애꿎은 세월만 보냈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러한 일은 비단 도로명주소 변경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행정이나 법률의 변경이 필요할 때면 이와 같은 일들은 늘 똑같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일을 시행하기에 앞서 일정기간 유예기간을 주는 것은 그 시간 안에 새롭게 바뀌는 것들에 대해 미리 준비하고 대비하라는 이유에서 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일들은 시간만 늦췄을 뿐 그 기간 동안 딱히 별다른 행동의 변화가 없으니 결과적으로 애꿎은 시간만 까먹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뒷일이야 그때 가서 또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아무 대책 없이 당장 그 순간만 모면하는 상황으로 끝나 버릴 거면 굳이 제도 시행을 유예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요.



제도 시행을 특정 기간 유예 하면 그 기간 동안 각자 변화 예고된 제도에 적응하려 일말의 노력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어영부영 세월만 보내다가 정작 시행일이 다가오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불만만 쏟아 내고 있으니 이는 괜한 행정력 낭비에 아까운 시간만 축내는 꼴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친한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그 친구는 담배도 좋아하고 술도 즐깁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도 중년의 나이로 접어들다 보니 건강에 적잖은 신경을 씁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2년마다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습니다. 검진을 받고 나면 그의 결과지는 고혈압, 지방간, 혈 중 콜레스테롤, 공복 혈당 수치등 많은 종목이 위험 단계에 있다는 의사 소견이 따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예방하기 위해 금연과 금주를 하라는 조언도 함께 말이죠. 그런데 친구는 결과지를 받아보고 “아! 내 몸 상태가 이렇구나”라고 한 마디 내뱉고는 별다른 행동의 변화를 보이지 않습니다. 여느 때와 똑같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일상을 반복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친구는 건강검진을 왜 받았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그가 건강검진을 받은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요.



  건강검진을 받는 이유는 당장 내 몸 안에 짐재한 눈에 띄는 질병을 찾아 치료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현재 내 몸의 상태를 확인해 그 결과를 바탕으로 금연, 금주, 그리고 운동과 식습관등 생활방식을 개선해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많은 질병을 미연에 예방하고자 하는 이유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임상소견을 받고도 별다른 조치 없이 검진받기 전과 똑같은 생활을 하니 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이 아닌가 말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시행하기에 앞서 유예 기간을 주는 것은 그 기간 동안 충분한 대비를 해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었을 때 불편함이나 피해가 발생되지 않도록 준비하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을 아무런 조치도 없이 그냥 보낸다면 이것은 건강검진에서 좋지 않은 소견을 받고도 생활습관을 바꾸지 않고 그저 병을 키우는 것과 똑같은 무지한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럴 거라면 굳이 행정력과 시간을 낭비해 가며 유예 기간을 가질 필요도 없는 것이고요.



   마지막으로 근래 성남 계곡 상인들에게 해마다 불법 시설물 철거의 계고장을 보내고 시정되지 않자 담판을 짓기 위해 시장과의 대화에 참석한 어느 상인의 말이 떠오릅니다. 갑자기 이렇게 일방적으로 철거를 추진하면 어떻게 하느냐고요. 분명 해마다 계고장을 보내고 문제를 지적했는데 말이죠. 우리는 이러함들을 볼 때 지금까지 우리가 무감각하게 반복해 왔던 제도시행의 유예기간 이유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21.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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