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ero Sep 26. 2023

건조체 글쟁이의 삐딱한 세상-꼴통

20. 비밀번호

지난 12월 10일. 20년 만에 공인 인증서가 폐지되었습니다. 온라인 상거래와 공적업무에 있어 필수 적인 장치로 우리를 힘들게 했던 공인인증서가 드디어 폐지가 된 것입니다. 시민들은 그동안 우리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액티브 x에서 벗어나게 해 준 이번 조치를 반기며 해마다 갱신하거나 usb에 보관해 다녀야 했던 불편을 털어버리게 된 것에 큰 기쁨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대면 거래 위주였던 상거래와 공적 업무들이 온라인과 모바일의 비대면 시대로 바뀌면서 우리는 공인인증서등 비밀번호가 필수인 세상에 살게 되었습니다. 예전 은행업무의 통장거래에서만 사용되던 단순한 보호 장치가 세상이 바뀌면서 생활전반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것입니다.



  어느새 우리의 삶 전반에 밀접하게 자리한 비밀번호는 늘 금융과 온라인 사기거래의 범죄를 대항하는 개인보안의 최전선이었습니다. 하지만 날로 지능화되어 가는 범죄자들의 기술 발달로 기존 4자리로 족했던 비밀번호는 더 이상 비밀번호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막으려는 자와 뚫으려는 자, 이들 상호 간의 치열한 두뇌 싸움은 막으려는 자에게 좀 까다롭고 어려운 비밀번호를 요구하며 뚫으려는 자들의 위에 자리하려 끊임없이 노력 중인 것입니다.



    공공기관, 금융, 온라인 쇼핑몰 등, 요즘 온라인상에서 공적업무를 보거나 은행업무 또는 물건을 구입하려면 해당 사이트의 회원가입이 필수입니다. 그러다 보니 요즘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비밀번호의 수가 한두 개가 아닙니다.



  처음 4자리로 시행했던 비밀번호는 이제 숫자와 영문, 특수문자를 포함한 최소 8자리 이상까지 늘어났고 그것도 모자라 범죄의 노출 우려로 이를 주기적으로 변경해야 하는 실정에 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때 비밀번호 변경을 위해선 이전 사용 했던 번호로는 재 변경이 불가합니다. 전화번호와 차량번호등 유추가능한 번호 또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 보니 매번 지금까지 사용한 적 없는 새로운 번호를 생산해 내어야 돼 이제는 쉽게 잊어버리지 않을, 즉 일상과 관련된 숫자를 더 이상 찾기가 어려울 지경까지 된 것입니다.



   물론 범죄자로부터 개인의 안전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이러한 정책은 불가피한 면이 분명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워낙 우리가 가지고 있는 비밀번호의 수가 많고 복잡하다 보니 정작 본인이 자신의 비밀번호를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온라인 사용이 많은 사람일수록 개인이 가지고 있는 비밀번호의 수는 많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영문, 숫자, 특수기호의 조합으로 8자리 이상으로 만들어 놓은 비밀번호를 다 외우고 있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래전에 가입해 놓았던 사이트에 볼일이라도 있어 급히 일을 처리하려고 하면 여러 비밀 번호가 머릿속에서 엉켜 접속은커녕 3회 이상 틀린 비밀번호 입력으로 진입 자체가 차단되어 버리는 실정입니다. 그러면 당사자는 다시 처음부터 복잡한 본인 인증 절차를 거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여 비밀번호를 또 변경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고요



  이렇게 다양한 비밀 번호를 수시로 만들고 또 새롭게 변경해야 되다 보니 중년의 저는 더 이상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비밀번호를 변경할 때마다 수첩에다 적어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만약 기억하지 못할 것을 대비해 비밀 번호를 노트나 휴대폰에 메모해 놓는다면 그게 비밀번호로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난센스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는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복잡하게 만들어 놓은 비밀 번호를 정작 범죄자들은 해킹 등을 통해 다 들여다보고 있는데 당사자인 본인만 모르는 웃지 못할 꼴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요즘은 그래도 지문과 홍채 같은 생체인식 시스템이 발달하면서 점차 아날로그 비밀번호가 사라져 가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변화가 시작단계이다 보니 옛날의 비밀번호를 시스템을 온전히 대체하려면 아직 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우리는 그 기간 동안 여전히 개인 정보 입력을 통해 다시 인증받고 그걸로 새로운 비밀번호를 만들어야 하는, 비밀번호와 우리 기억력의 한계에 얽힌 치열한 전쟁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할 것입니다.



   현대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우리가 필수적으로 지니고 있는 작은 전화기 하나에 다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첨단시대라는 말로 생활이 편해진 만큼 우리는 각자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한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 노력의 최전방에는 역사 깊은 비밀번호라는 것이 있습니다. 문자와 숫자와 기호가 얽힌 비밀번호 말입니다. 이 비밀번호는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첨병임이 분명합니다.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우리의 정신적 에너지를 갉아먹는 힘든 존재임도 분명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대안은 무엇이냐. 그냥 비밀번호를 자의로 변경하고 싶은 사람만 변경하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 의무적으로 다 바꾸게 강제하지 말고요. 도대체 우리가 기억과 연관도 없는 비밀번호를 끝도 없이 어떻게 계속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설사 또 그 일이 가능하다 해도 그것을 다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비밀번호를 다른 곳에 적어 놓는 말도 안 되는 일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죠. 또 혹여 비밀번호가 도용당해 소비자가 피해를 입더라도 업체에서 책임져 주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고객의 비밀번호 관리 소홀로 그 책임을 고스란히 고객에게 돌릴 거면서 말입니다.



아무튼 저는 요즘 끊임없이 변경을 요구하는 비밀번호를 보며, 잊어버리고, 변경을 위해 복잡한 절차로 다시 인증받아야 하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지긋지긋한 비밀번호의 굴레 속에서 영원히 헤매야 한다는 우스우면서도 슬픈, 요즘말로 웃픈 생각을 도저히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2020. 12. 14

작가의 이전글 남자. 사랑. 연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