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예약제
기다림은 고독한 행위입니다.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하며 외롭게 견뎌내야 하는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 그것이 바로 기다림인 것입니다.
불과 이십여 년 전 만해도 병원 진료와 미용실에서 머리를 손질하기 위해서는 기다림과의 전쟁이었습니다. 내 순서가 정확히 언제인지도 모르고 혹여라도 물어보면 곧 된다는 말만 들으며 자신의 차례를 끊임없이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요즘은 스마트 폰이라고 하는 똑똑한 기계가 있어 기다림의 지겨움을 덜하지만 당시에는 하염없이 시계만 바라보며 그 기나긴 시간을 버텨내야 했던 것이죠.
우리 사회는 그러한 고독한 싸움을 해결하기 위해 획기적인 방법 하나를 고안해 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약제”라는 방식이 그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시간을 미리 지정해 선착순으로 막연하게 기다려야 했던 불편함을 털어내고 지난한 시간과의 싸움에서 결국 승리를 이룩했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그 승리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예약제가 일상화되면서 예약을 한 시간에 제대로 업무를 볼 수 없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져 버린 것입니다
하나의 예로, 십 수 년 전 아버지가 편찮으셔 일 년 정도 대구의 한 대학 병원을 다닌 적이 있습니다. 외래 진료를 받는 날이면 진료가 끝나고 어김없이 다음 진료를 위해 날짜와 시간을 정하고 병원을 나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예약을 하고 진료날 병원을 찾아도 정해진 제시간에 진료를 받아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짧게는 최소 1시간 , 길게는 근 두 시간 가까이도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대기실에 앉아 정확히 언제인지도 모를 자기의 순서를 기다리는 일은 괴롭고 힘듭니다. 저는 지병으로 힘들어하시는 아버지를 모시고 환자들로 복작 거리는 대기실에 앉아 간호사에게 이름이 불려지기를 기다릴 때마다, 이럴 거면 도대체 왜 예약제를 시행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접수 순서의 선착순으로 진료를 해도 그 시간이면 충분할 듯싶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또 하나는 미용실에서 있었던 일로, 저는 머리를 하려고 사흘 전에 미용실로 전화를 해 저에게 맞는 시간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당일날 십여 분 정도 일찍 미용실로 갔습니다. 그러나 미용사는 다른 사람의 머리를 손질하고 있었고 저에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인정상 따지기도 뭣하고 해서 빨리 앞사람이 끝나기를 바라며 무료하게 기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다림의 시간이 무려 한 시간을 넘겼습니다. 전 무척 화가 났지만 그간의 안면 때문에 차마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늦어진 시간에 머리를 하고 나왔습니다. 미용사는 값을 지불하는 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계속했지만 저는 그날로 그 미용실을 두 번 다시 가지 않았습니다.
예약제는 분명 선착순에서 발생하는 기다림의 시간을 제거해 제공자와 사용자 간 불필요하게 버려지는 시간의 낭비를 막아 상호 효율적인 일처리를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누구의 잘 못 인지 그 좋던 취지가 어느새 무의미해져 버린 지경이 되어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예약을 해놓고 아무 언질도 없이 일방적으로 오지 않는 일을 “노쇼”라고 일컬으며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한 창 비판했던 적이 있습니다. 식당 같은 곳에서 예약을 받아 음식 준비를 다 해 놓았는데 고객이 사전 통보도 없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업체 측에서 경제적 피해를 보는 일이 자주 발생했기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뉴스를 접하며 노쇼를 저지르는 고객의 몰염치함을 성토했었고 말이죠.
우리의 성토는, 약속을 지키지 않음으로 받게 되는 업체 측의 피해가 만만치 않고 약속이라는 서로의 믿음을 어김으로 상호 간에 불신의 싹이 트는 사회의 그릇된 상식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공자 측은 이렇게 고객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노쇼 운운하며 그들의 잘못을 따지면서 정작 자신들은 앞에서 제가 겪은 일처럼 예약시간을 지키지 않았을 때 고객이 입은 시간적 피해에 대해 아무런 보상도 없이 그냥 어물쩍 넘어가 버립니다.
우리는 불필요한 시간으로 사용자와 제공자 측 서로가 입을 피해를 줄이기 위해 예약제라는 방식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약을 해 놓고도 제시간에 볼일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말이 예약제이지 도착한 순서대로 일처리를 하는 예전의 선착순과 무엇이 다르다는 것입니까. 물론 이런 일은 제가 이야기한 앞의, 병원이나 미용실에서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대형병원 같은 곳 말입니다. 그런데 병원 같은 경우 웃긴 건, 그렇다고 예약환자들이 개별적으로 다들 의사와 천천히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들 알다시피 정작 환자들의 의사와의 면담은 채 몇 분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럼 이처럼 몇 분도 안 되는 진료에 왜 예약시간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입니까. 진료시간이 그리 길지도 않은 예약제에서 환자 한 명당 몇 분을 기준으로 예약 시간을 배정하기에 그렇게 오래 기다리는 일이 벌어지는지 진료시간이 이처럼 지연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냐 이 말입니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세상이다 보니 모든 일을 딱 제시간에 맞춘다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 일 것입니다. 특히 코리안 타임이라는 한국인 특유의 시간정서에서는 더욱더요. 하지만 비록 그렇다 손 치더라도 일 이십 분이 아닌 그 이상의 시간이라면 그건 분명 더 이상 예약제라고 하긴 어렵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고객으로서의 노쇼도 문제지만 제공자 측의 사유로 제때 지켜지지 않는 예약시간의 업무 불이행도 이제는 분명 문제의 하나로 인식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2021. 4.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