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표지석
새해가 밝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떠오르는 붉은 해를 보며 한 해의 안녕과 무탈을 빌기 위해 가까운 산을 찾습니다. 저도 차례를 지내고 바람도 쐴 겸 오랜만에 동생과 함께 동네 뒷 산을 올랐습니다. 비록 짧은 거리이기는 하지만 어린아이들의 손을 잡고 서로를 응원하며 산을 오르는 가족들이 적지 않게 보였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며 이렇게 가족들과 함께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는 산들이 우리 주변에 있어 얼마나 좋은지 그 산에 대한 고마움을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땀을 흘리며 가쁜 숨으로 정상에 도착하자 유독 눈에 띄는 게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1m 남짓한 높이의 크기에 속을 파내 검은 글씨를 새겨 넣은 표지석이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지 못했던 것인데 산을 오지 않은 사이 지자체에서 만들어 세운 모양입니다. 이제 동네가 개발돼 사람이 많이 찾다 보니 편의를 위해 예전에는 눈에 없던 표지석을 이렇게 정비의 일환으로 세워놓은 것이겠지요. 아무튼 허연 빛이 눈부신 돌에는 산의 이름인 “궁산”이라는 두 글자가 한문의 반듯한 문체로 검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국토의 70%는 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나라는 실질적인 산악 국가라고 해도 별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이유는 나라 전국 곳곳 어디든 산이 있고 심지어 도심 가운데까지도 산이 존재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등산 인구는 해마다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산에 대한 시민들의 애착 때문인지 각 국립공원관리공단과 지자체들은 사람이 많이 이용하는 주요 산들의 등산로 정비는 물론 산 이름을 증명하는 표지석들을 봉우리 이름을 새겨 정상에 세워 놓습니다.
산을 타본 사람들이라면 모두 한 번 씩들은 보았을 정상 표지석. 그 돌에는 대부분 그 산의 봉오리 이름과 해발을 기준으로 하는 산의 높이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산의 이름은 한문으로 새겨져 있는 게 보통으로 저는 이 모습에서 적지 않은 반감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굳이 산 이름을 꼭 한문으로 새겨야만 하는가 해서 말입니다. 물론 우리나라 산들의 이름이 한문에 뜻을 두고 있기에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만약 그렇다면 한글로 적은 후 그 옆에 작게 한문을 새겨 놓으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될 일을 굳이 한문세대가 물러가고 있는 요즘 한글이라는 고유의 언어를 가지고 있으면서 꼭 한문으로 해 놓아야만 하는 것인가 이 말입니다.
어느 날 도심을 운전하다 붉은 신호등에 걸려 차를 멈춰 서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잠시의 무료함을 달래려 고개를 돌려 창밖 건물들의 간판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많은 간판 중에 유독 눈에 띄는 안내문구 하나가 보였습니다. 그것은 모 은행 지점 유리창에 걸린 문구로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DIGNITY DGB 프라이빗 뱅킹 죽전 PB센터” 저는 은행 창문에 붙여진 이 안내 문구를 멍하니 바라보다 녹색불이 들어왔으니 어서 가라는 뒤차의 경적소리에 급하게 차를 출발시켰습니다.
저는 사거리를 통과하면서 한 참을 좀 전에 읽었던 은행 안내문을 생각했습니다. DIGNITY DGB 프라이빗 뱅킹 죽전 PB센터. “DIGINITY”는 무슨 약어 같고 “DGB”는 은행 상호의 영어 머릿글자이고 “프라이빗 뱅킹”은 보잘것없는 영어실력이라 뜻을 잘 모르겠기에 급히 사전에서 용어를 찾아보니 “ 금융기관이 고객을 상대로 예금과, 세무, 법률상담, 증권정보 제공, 부동산투자 상담 등 종합적인 재테크를 위해 자산을 특별 관리해 주는 서비스”라고 정의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뒷 글자인 “죽전”은 은행이 위치한 지역명일 것이고 “PB”는 Personal best 즉, 개인최고 성과라는 소리이며 마지막 “센터”는 “중심지”또는 “특정 목적이나 활동을 위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 중심, 가운데”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말들이 개별적인 수준차이는 있겠지만 한국에서 정규 고등교육을 이수한 제가 글을 읽고도 그 뜻을 제대로 짐작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온통 영어라서 말이죠. 안내문구는 일반 사람이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저의 지론입니다. 하지만 요즘의 사회는 저의 이런 생각과 사뭇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요즘 우리 주변은, 앞 세대에는 한문이요 그들의 뒤를 잇고 있는 우리 세대는 온통 영어로 점철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사실 이는 우리의 안보를 책임지는 군부대조차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UDT니 UDU니 HID니 SDT니 SSU, CCT 등, 분명 해군특수전여단, 정보사 특수요원등 버젓이 우리나라 말의 이름이 존재하는데도 온통 영어로 칭하는 것입니다.
국가의 위상이 선진국 반열인 G8에 올라가고 우리의 음악과 드라마, 음식과 IT기술등이 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세계는 지금 한국 열풍으로 열광하고 있는데 우리는 정작 우리의 언어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어제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개막을 했습니다. 그동안 실력을 갈고닦은 선수들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서로의 경기에서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유니폼에는 분명 영어로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물론 국제 경기이니 당연한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세계적인 경기가 아닌 자국에서 펼쳐지는 국내 경기에서도 선수들의 유니폼에는 대부분 영어 이니셜로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야구를 좋아합니다. 여러분들이 주의 깊게 본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야구선수들의 유니폼에는 요즘의 추세에는 보기 힘들게 옛날부터 지금까지 꿋꿋하게 한글로 이름을 새기고 있습니다. 저는 특정 스포츠에 빠지는 사람은 아니지만 야구를 시청하면서 늘 이 부분을 대단하게 생각해 왔습니다. 여러분들도 짬이 된다면 야구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가져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학창시절에는 필수로 한문을 배웠고 지금은 몇 년째, 훗날 미국 대륙횡단을 위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영어 공부를 하고 있는 저의 작은 바람입니다.
2022.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