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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Jun 07. 2023

건조체 글쟁이의 비딱한 세상-꼴통

53. 고의와 우발, 반성문 그리고 목숨의 가치

   요즘은 뉴스 보기가 겁이 납니다. 왜냐하면 하루가 멀다 하고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누군가의 생명을 강제로 빼앗아 버리는 행위의 살인. 그래서 저는 이번 장에서, 이제는 너무 많이 벌어져 우리의 의식에서 무감각해져 버린 살인과 그 행위자의 처벌에 대한 판사들의 판결에 대해 한 번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현대는 도시적 삶에 바탕을 둔 고립과 단절의 정서 때문인지 살인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이유와 방법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엽기적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보면, 다섯 살도 안 된 친자식을 때려 숨지게 하는가 하면 친 부모를 둔기로 후려쳐 목숨을 빼앗은 것은 물론 친한 친구와 술자리에서 벌어진 작은 말다툼에 앙갚음을 하려고 계획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그야말로 천륜과 인륜을 저버리는 무자비한 죽음들이 벌어지고 있는 실정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살인 사건이 보도되다 보니 우리는 시나브로 그것들에 너무 익숙해져 이제는 의당 그러려니 하며 그것들을 받아넘깁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살인을 저지른 자에 대한 법원 판사들의 판결도 지각 있는 사람들의 법 감정과는 동떨어진 어처구니없는 판결을 할 때가 많아진 것을 부인하기 힘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판사들의 살인자에 대한 판결에서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한 가지 짚어 보자면 그중 제일 큰 것은 바로 감형 이유입니다.



판사들이 살인자에 대해서 베푸는 감형 이유를 찾아보면 참으로 다양하기 그지없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몇 가지를 나열해 보면 이렇습니다. 우선 가해자가 동일 전과가 없는 초범이라는 점, 고의성이 없는 우발적이었다는 점, 술을 마신 상태의 심신 미약이나 심신상실 상태였다는 점, 그리고 반성문을 쓰고 반성하고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판사는 그런 이유들로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버린 사람에게 일반인들의 상식과는 동떨어진 가벼운 형을 부여하고 살인을 저지른 당사자는 그런 감읍한 판결로 얼마간의 징역을 산 후 곧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생활로 되돌아가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판사들의 살인자에 대한 이런 감형이유를 들을 때면 살인자에 대한 분노만큼 그들 판사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릅니다. 그들은 항상 판결 주문을 할 때는 늘 먼저, “살인을 저지른 피고인의 죄질이 악랄하고 상당히 좋지 않다. 이러한 죄질로 시민들의 정서와 법김정을 고려했을 때 중형 선고가 불가피하다”라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참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항상 그다음 문장에 있습니다. 바로 “하지만”이라는 단어 말입니다.



살인을 저지른 피고인의 죄질이 악랄하고 상당히 좋지 않다. 이러한 죄질로 시민들의 정서와 법 감정을 고려했을 때 중형 선고가 불가피하다. “하지만”죽일 의도가 없었다. 우발적이었다. 그리고 술을 마셨고 초범이다. 반성문을 써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라고 말하며 감형을 해줘 버립니다. 그래서 요즘은 강력 살인 사건처럼 사람을 죽였다 하더라도 한 5년 정도의 형을 살면 석방되어 버립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사라져 버렸는데 5년 말입니다. 죄질이 악랄하다는데 5년 말입니다.



초범에 우발에 술을 마셨고 반성문을 써 반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뭐가 어떻다는 겁니까. 가해자가 고의성 없는 우발적 행동이었고 심신 미약에 초범이었다면, 그리고 반성문을 썼다면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피해자가 가해자가 감형받은 이유만큼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라도 한다는 말입니까.



   사람의 목숨은 단 하나뿐입니다. 작가 김훈은 그런 사람의 죽음을 일회성의 소멸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목숨은 한 번 잃어버리면 그것으로 끝이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판사들이 가해자에게 베푸는 여러 가지 감형 이유만큼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인 것이죠. 한 번 잃어버리면 그것으로 끝나버리는 일회성인 인간의 생명 앞에 어떻게 그런 감형의 이유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저는 그것이 참으로 의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07년. 이창동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전도연, 송강호가 주연을 맡은, 제목 “밀양”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남편을 잃고 하나뿐인 아들과 고향 밀양으로 돌아온 주인공 전도연. 그녀는 밀양에 정착하며 피아노 학원을 차리고 지역 모임에 참여하며 조금씩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 가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어느 날 아들이 납치 살해 당하는 일이 벌어지고 그녀의 삶은 다시 한번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녀는 주변인들은 실의에 빠진 그녀를 종교로 귀의시켜 어떻게든 세상을 버텨나가게 애를 씁니다.



종교의 힘을 통해 작게나마 마음의 위안을 찾은 그녀는 고뇌 끝에 지신의 아들을 납치 살해한 범인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면회장으로 나온 그는 자신이 용서도 하지 않았는데 가해자로부터 수감생활을 하며 하느님을 믿게 되었고 그로부터 이미 용서를 받아 자신의 마음은 한없이 평안해졌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녀는 자의적인 그의 생각과 말들에 층격을 받고 세상의 모순에 대해 다시 한번 큰 절망과 울분 느낍니다.



저는 영화 밀양의, 하느님으로부터 다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마음이 평안하다는 가해자의 모습에서,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살인자에게 감형을 해주는 요즘 판사들의 모습이 겹치는 것을 느낍니다. 어떻게 피해를 당한 당사자와 그 가족들이 용서해 주지도 않았는데 제삼자가 이 말도 안 되는 이유들로 그들의 감형을 결정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사람의 목숨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 귀중한 목숨의 가치는 초범이니, 죽일 의도가 없었던 우발적인 행동이니, 또는 심신 미약이나 심심상실 그리고 반성문 작성 운운하며 쉽게 감형될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한 번 잃으면 그것으로 끝이 나버리는 인간의 목숨 앞에 그런 감형의 이유들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었다는 결과는 같은데 고의성이 있고 없고 와 우발적이었다 아니었다와 반성문을 썼니 안 썼니가 무슨 상관이라는 말입니까.



저는 무지해서 살인자들에게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감형의 선처를 베푸는 그들 고귀한 판사님의 법학적인 깊은 뜻은 헤아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것은, 진정 한 인간의 생명에 대한 가치를 생각한다면 그 감형의 이유들에 목숨의 값어치에 대한 좀 더 무겁고 진중한 판단이 고려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따름입니다.


2021.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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