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변곡점을 맞이한 행운의 날을 꼽자면 바로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발급받은 날을 들 수 있겠다. 이 날 나에게 행운이 조금만 모자랐다면... 지금의 나를 상상하기 어렵다. 이십 대의 유종의 미도, 삼십 대를 새롭게 시작할 용기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오로지 워킹홀리데이 비자여야 했다. 반드시 학교를 등록해야 하는 학생비자나, 3개월밖에 체류가 안 되는 관광비자는 성에 차지 않았다. 나의 치유를 위해 적어도 1년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 수 있게 스스로에게 기회를 줬기 때문이다.
뉴질랜드의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대사관에서 공지한 기간에 선착순으로 발급을 한다. 비자 발급 수에 비해 신청자가 많아서 대학교 수강 신청 못지않게 스피드가 요구된다. 걱정이 많은 성격이라 공지가 나오기 몇 주 전부터 인터넷 카페에 가입을 했다. 미리 정회원으로 등급 신청을 마친 뒤 성공 후기와 신청 노하우를 정독했다.
회원가입은 신청일 전에 미리 해놓는 게 중요하다. 친절한 유학 사이트 직원들이 신청서 양식을 올려놓은 덕분에 미리 신청 문항을 확보할 수 있었다. 비자 신청 사이트가 열리면 막힘없이 빈칸들을 채우기 위해 신청서 양식에 있는 문항들을 메모지에 먼저 적어두었다. 또한 당일 서버가 다운되어 인터넷 속도가 저하될 것을 대비해 노트북, 데스크톱, 휴대폰 등 최대한 경우의 수를 준비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이민성 사이트는 뉴질랜드 현지 시간을 기준으로 오전 10시부터 비자 신청을 받는다. 한국 시간으로는 아침 7시 전부터 서버에 접속할 채비를 갖추어야 한다. 마치 수능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잠을 설치느라 일찍부터 잠에서 깼다. 떨리는 마음으로 6시 30분쯤 미리 로그인을 해두었다.
인터넷 카페 채팅방에는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이 접속해 함께 초조함을 달래고 있었다. 인터넷 속도가 빠르다는 이유로 굳이 PC방을 가있는 사람도 많았고,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분들이 더 접속이 빠를 거라는 소문도 있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대신 크롬을 사용해야 한다, 아이폰이 더 접속이 잘 된다는 둥 여러 가지의 추측성 글들이 인터넷 카페 채팅창을 통해 빠르게 확산되었다. PC방도 가고 싶지 않고, 아이폰도 없는 나로선 경건하게 내 운명을 맞이하기 위해 최대한 속도전에 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뉴질랜드 시간으로 10시, 한국 시간으로는 –행운의- 7시가 되었다. 그러나 앞으로 펼쳐질 반전의 발단처럼 서버는 이미 신청 시간 10분 전부터 멈춰버렸다. 미리 로그인을 해놨지만 다음으로 진행을 하려고 시도하자 페이지를 찾을 수 없다는 하얀 화면뿐이었다. 작년에는 오후 2시에 신청이 마감되었다니까 조금 침착해보기로 했다. 채팅창은 역시나 난리가 났다. 신청서만 작성하고 출근 또는 등교를 하려는 직장인과 대학생들은 시간이 지체될수록 멘탈이 붕괴되고 있었다. 채팅창에서는 동지였던 그들이지만 한편으로는 경쟁자이기도 해서 그들이 얼른 포기하고 출근과 등굣길로 나서길 바라기도 했다. 이럴 때 보면 내가 백수여서 참 다행이다.
몇 분이면 곧 정상화가 되겠지 싶어 계속 새로 고침 버튼만 누르고 있다 보니 벌써 3시간이 흘렀다. 아직 첫 단계인 여권 번호조차도 입력을 못하고 있으니 슬슬 초조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누구도 성공 후기를 올리지 않는 걸 보니 다른 사람들도 다 안 되는 것 같은데, 밥이나 먹고 다시 해볼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배고픔의 유혹이 이렇게 위험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신청서의 최고 정점인 카드 번호까지 입력했다는 사람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특별히 늦게 시작한 것도 아니고, 준비를 덜한 것도 아닌데. 설마 취업판처럼 여기서마저 복불복을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혹시나 운이 닿지 않아 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 다른 사람들이 먼저 자리를 다 차지해버리면 어쩌나 싶은 조바심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정신을 가다듬고 노트북 대신 휴대폰을 들고 인터넷 공유기 앞으로 갔다. 당시 내가 쓰던 휴대폰은 구형 모델로 인터넷에서 다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화면이 멈출 정도로 속도가 평균 이하였다.. 도저히 이 속도전에 낄 상대가 아니었으나 놀랍게도 휴대폰으로 다시 로그인을 하니 오전 9시 45분쯤 더듬더듬 페이지로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혹시라도 접속이 멈출까 봐 아슬아슬하게 외줄 타기를 하던 끝에 10시 13분, 드디어 나에게 비자 접수비를 결제할 수 있는 권한이 허락됐고, 비자 신청에 성공했다는 축하 메시지가 화면에 떴다.
몇 분 뒤, 선착순 인원이 모두 차서 비자 신청이 종료가 되었다. 밥 먹으러 갔다 왔으면 나 역시 뉴질랜드행 막차를 놓칠 뻔했다. 카페 채팅방에는 저마다의 사연으로 온갖 곡소리가 들렸다. 카페에서 가장 많은 활동을 했던 분이 신청서 작성에 실패했다는 소식은 내 친구의 일인 듯 안타까웠다. 어떤 사람은 비자 신청 전에 미리 신체검사까지 받았는데 비자 신청에 실패하기도 하고, 벌써 제주도에서 서울까지 신체검사를 받으러 왔는데 여권을 두고 와서 다시 되돌아갔다는 웃픈 사연도 있었다.
그중 제일 타격이 심한 곳은 비자 대행을 맡은 유학원이었다. 이미 어학연수 과정까지 설계해놓은 상태에서 입국의 최초 관문인 비자 발급에 실패를 했으니 면목이 없을 뿐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인생 설계부터 다시 하게 만든 셈이다. 아무리 유학원이 비자 발급의 노하우가 풍부하다고 해도 본인 인생인데 선착순으로 접수받는 워킹홀리데이 비자 정도는 직접 발급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씁쓸한 마음도 들었다.
비자 신청이 끝나면 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 정해진 기간 내에 지정된 병원에서만 가능해서 미리 예약해놓은 사람들이 잔뜩 몰려있었다. 이대로라면 정해진 기간까지 신체검사 결과지를 전달하지 못할 수도 있고, 그럼 비자 발급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임시방편으로 일부 병원이 현장 접수를 받는다고 하는 바람에 전날 밤부터 병원 앞에서 장사진을 치렀다고 한다. 이런 사정을 전해 들은 뉴질랜드 이민성에서는 신체검사 기간을 연장하기로 했다.
그러나 5월 안에는 한국을 떠나고 싶은 마음에 매일 병원에 전화를 하고, 항의도 해서 결국 5월 초에 신체검사를 마쳤다. 회사를 다닐 때나 비자를 받을 때나 투쟁의 연속이다.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내 인생 어디에도 없다.
단 1년을 살기 위한 비자도 이렇게 애를 태우며 발급받는데, 영주권이나 시민권은 오죽하랴. 태어날 때부터 아무런 절차 없이 영구 주거권을 준 한국이란 나라에 새삼 감사함이 느껴졌다. 어쨌든 힘들게 딴 비자인 만큼 365일 꽉 채워서 알차게 살아야겠다.
평소에는 참 운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치 뉴질랜드 국기에 달린 별이라도 딴 것처럼 행운아가 된 기분이었다. 이후 항공권 구매부터 뉴질랜드 정착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일은 술술 풀리기 시작됐다. 무엇보다도 해냈다는 자신감,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해내려는 열의는 나를 다시 이십 대로 이끌어 내기에 충분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