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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심지 Apr 15. 2021

서른 한 살,
불행했던 이십 대를 다시 사는 법

두드려라, 그러면 열리리라!

 이십 대 중반부터 시간에 쫓기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시작하려 할 때는 '너무 늦은 건 아닌가?' 싶어 재보기가 일수였다. 나보다 한 살이라도 어린 사람의 시간을 부러워하며 ‘1년 전이였으면 했을 텐데. 지금 난 시간이 많이 없어.’라는 촉박한 마음으로 경력을 쌓는 일 이외의 계획은 끼어 들 틈이 없었다. 그러니까 나이가 먹을수록 경력과 경험은 쌓이지만 꿈은 점점 더 줄어들었다.

 그렇게 쫓기듯이 살다 보니 나는 언제나 늦었다고 자책하며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엄격하게 밀어냈다. 마치 경주용 말의 눈가리개처럼 앞만 보고 달리게 했다. 말은 눈이 옆면에 달려서 얼굴 양 옆에 눈가리개를 하지 않으면 주변에 시선이 팔려 속력을 내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마부는 눈가리개를 씌우고 앞만 보고 달리게 한다. 나 역시 마부처럼 내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신경 쓰지 말고, 늦었으니 빨리 달리라고 채찍질만 해댔다. 주변 어딘가에 있었을지도 모를 내 기회를 내가 막았던 것이다.        


 그렇게 서른이 되었다. 회사의 해고 통보로 시작된 노사분쟁은 내 경력을 절단 내버렸다. 다시는 이 바닥에서 일을 못해도 어쩔 수 없다는 각오로 싸웠다. 결국 우울증으로 일을 할 의욕도 없어졌고, 합병증처럼 서른 병까지 찾아왔다.

 '내가 이 꼴을 보려고 내 이십 대를 그렇게 몰아붙이며 학대했던 건가? 잠깐이라도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정말 나에게 잘해줄 수 있는데……. 늦었다고 보채지도 않고, 먹고 싶고, 사고 싶고, 놀고 싶고, 하고 싶은 거 다 시켜줄 수 있는데. 왜 나는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을까?'라는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시키는 대로 닥치고 일할 수밖에 없었던 내 이십 대가 불쌍했고 미안했다.     


 한편으로는 ‘드디어 이 바닥을 떠나는구나,’ 하는 마음에 후련하기도 했다. 더 기회가 없다는 것을 실감했을 때, 끝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더 용감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아등바등 매달리고 있을 때는 몰랐다. 마치 사이비 종교에 빠졌던 것처럼 떠나고 나니 그 악착같던 시간들이 무의미했음을 깨달았다.

 ‘패션회사에서 경력을 쌓아 브랜드 매니저로 일하고 싶었던 내 꿈이 이제야 완전히 부서져 버렸구나.’

 좋은 선배가 되고 싶었는데 나쁜 후배로 퇴사해버리고 만 것이다.


 회사 일을 완전히 끝내고 나니까 아니, 쳐다보기도 싫을 정도로 신물이 나버리니까 내 머릿속에 쉴 새 없이 재깍거리던 시계 소리도 멈췄다. 더 이상 일에 쫓기고 쫓을 필요가 없어졌다. 매번 나를 재촉하던 시계가 멈추자 이 시계를 다시 맞출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십 대를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리리라!’라는 말처럼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린 끝에 묘안을 찾아냈다. 바다만 건너면 새로운 땅이 있는데 거기서 1년간 맘껏 휴가를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나이도 두 살이나 어려질 수 있다. 바로,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 한국에서는 나를 서른한 살로 취급하지만, 주로 만 나이를 쓰는 외국에 나가면 나는 스물아홉 살, 다시 이십 대가 된다.      


 마침 회사와의 조정이 끝난 뒤인 4월 말에는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 모집이 예정되어 있었다. 비자를 제때 받을 수 있다면 5월에는 한국을 떠날 수 있다. 그러면 적어도 내 생일까지 남은 몇 달간은 누가 뭐래도 나는 이십 대다. 더군다나 내 생일은 연말에 가까워 이십 대를 만끽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물론 한국에서도 만으로 스물아홉 살이긴 하지만 한국에서는 주로 만 나이에 두 살을 더한 서른한 살로 통용되니까 이십 대의 기분을 낼 수가 없단 말이지. 반면 외국에 나가면 한국의 불합리한 나이 공식을 걷어차고 공식적으로 두 살이나 어리게 살 수 있다. 어딜 가나 마음먹기 나름이겠지만 뉴질랜드라면 내 미련했던 이십 대와 우울했던 삼십 대를 다시 설정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름부터 New! 새로운, Land! 땅, 딱 느낌이 왔다.     


 1년 후, 다시 한국에 돌아온다면 무려 세 살이나 더 먹은 기분이겠지. 그래도 다시 이십 대를 살 수 있다면 삶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져있을 테니 이 정도 투자는 아깝지 않았다. 어차피 붙잡고 있는 일도, 결혼 적령기에 필요한 남자친구도, 내가 꼭 갚아야 할 빚도 없는 자유의 몸이니까 떠나지 못할 이유도 없다. 내 나이 대에 있어야 할 평범한 가정생활이란 어차피 지각인 걸. 기왕 늦은 거 새로운 곳에서 실컷 즐기다 돌아오든 아니면 그대로 눌러 살든지 일단 가보자. 새로운 땅, 뉴질랜드에서 나의 미안했던 이십 대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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