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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심지 Apr 07. 2024

등잔 밑의 행복

Are you happy with this?

 뉴질랜드에서 내가 택한 여정은 돈을 버는 일도 아니요, 관광을 목적으로 한 여행만도 아니었다. 물론 이 무계획이라는 계획도 언제든지 바꿀 여지는 충분했다. 나와 뉴질랜드 비자가 허락한 365일 동안은 그냥 할 수 있는 한 행복해지면 그걸로 된다. 이 여정은 온전히 내 치유를 위한 결정이었다.

 -비교할 바는 안 되지만 굳이 비유를 들자면- 암환자가 항암치료를 위해 병원에 남아 치료를 이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차라리 남은 일생을 좋은 곳에서 보내겠다며 병원을 떠나기도 한다. 나에게 한국은 그런 곳이었다. 내가 꾸준히 우울증 약을 타갈 수 있는 병원이 있고, 어쩌면 증세가 나아져서 다시 사회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는 계속해서 환자로 일생을 마감해야 할 수도 있다. 1년 후에 내가 어떻게 되어 있든지 우선은 나에게도 행복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감사하게도 뉴질랜드에서의 첫 번째 아침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여기는 안전하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비록 여럿이서 쓰는 도미토리 방에 얕은 매트리스 위였지만 마치 구름 위에 누워있는 듯 창가로 들어온 햇살을 온몸으로 맞았다.      

 이 날 내 눈을 호강시켜 줄 장소는 파넬Parnell에 위치한 프렌치 마켓이었다. 유럽 분위기가 물씬 나는 소품과 음식 등이 유명한데 주말에만 열고 그마저도 오후 1시쯤이면 문을 닫는다. 구글 지도는 최단 거리로 도보 40분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이것만 의지한 건 너무 낙관적인 생각이었다. 변수를 생각하지 못했던 것.

 오전 11시쯤이 되어서야 느지막하게 호스텔을 나왔다. 내 눈은 바닥의 떨어진 낙엽조차도 신기하다는 듯 곳곳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었다. 지도에 나와 있는 길로 가야 하지만 예쁜 건물을 보면 구경을 하느라 샛길로 빠졌다.

 뉴질랜드 표지판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길을 건널 수 없고 차만 다니는- 모토웨이 근처까지 가버리기도 했다. 주말인데도 길에 물어볼 사람조차 없었다. 어느덧 시간은 12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요즘 같으면 핸드폰의 지도 앱에 들어가 GPS를 켜고 음성 안내를 받았겠지만, 당시엔 휴대폰 유심도 구입을 못한 상태라 종이 지도와 가끔씩 잡히는 와이파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늦어도 오후 12시쯤에는 도착해야 넉넉히 구경을 할 수 있는데 아직 파넬 근처에도 못 온 것 같으니 마음이 조급해져 온다. 그때부터 풍경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에게 필요한 건 목적지를 향하는 길 뿐이었다. 그나마 문을 연 상점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멀리서 지나가는 사람을 찾아가 길을 묻기 시작했다.

 어찌어찌 파넬 동네까지는 온 것 같은데 오르막길과 갈림길 사이에서 또다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겨우 현지인 한 명을 만나 길을 물어봤지만 내 영어 실력으로는 완벽하게 도착지를 알아낼 수 없었다. 그렇게 당도한 곳은 미국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고급 주택가. 이곳은 더 사람이 없다. 최후의 수단, 가정 방문? 마당에 나온 사람이라도 있으면 말을 시킬 요량으로 남의 집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좀도둑처럼 나 왜 이러고 있는 거니? 그래도 초인종까지는 누를 용기가 나지 않아 근처를 배회하다가 겨우 프렌치 마켓을 발견해냈다.

 에계, 이게 다야? 프렌치 마켓은 내 예상보다 훨씬 규모가 작았다. 거의 끝나가고 있는 무렵인 걸 감안해도 이걸 보려고 오는 길에 풍경들을 놓쳤다니,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실내에 커피숍이 있기는 했으나 빵이나 커피 등을 즐기지 않는 나로선 디저트도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으니 남은 가게들이라도 보자는 마음으로 쥐어짜듯 아이쇼핑을 했지만 내가 산 것은 겨우 키위(NZD 2.5/1kg, 한화로 약 2천원)가 전부였다. 당장 목을 축이고 싶어서 과도를 빌리려고 했는데 배추를 썰 법한 큰 칼을 내민다. 어쩔 수 없이 그 큰 칼로 앙증맞게 작은 키위 하나를 깎아 먹었다. 그래도 키위의 나라답게 맛은 있네.

 허무한 마음을 안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길, 헛웃음이 난다. 아직 그 버릇을 못 고쳤구나. 시간에 쫓기며 목적지만 향해 가는 나. 이까짓 마켓이 뭐라고. 뉴질랜드에 하루 이틀 있다 가는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급해서 남의 집까지 가서 길을 물어볼 생각을 했는지. 만약 그날 프렌치 마켓을 찾지 못했거나 도착했는데 전부 문이 닫혀있었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돌아가는 길에서 기대하지도 않았던 멋진 풍경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뉴질랜드라는 이름만 들어도 상상이 되는 그림, 보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그런 장소를 만난 것이다. 시야에 가득 찬 푸른 하늘과 초록의 잔디. 오로지 혼자인 나를 위해 마련된 것 같은 벤치까지 놓여있었다.       


 베트남 여행을 갔을 때 전면으로 바다가 보이는 멋진 방에 묵은 적이 있었다. 방을 보여준 그녀는 “Are you happy with this?”라고 물었다. 아무리 멋진 방이라도 무슨 행복씩이나 들먹이나 싶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골랐을 때도 ‘Happy’라는 물음은 계속되었다. 상황에 맞게 의역하면 ‘이 정도면 마음에 드니? 만족하니?’라는 뜻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 ‘Happy’라는 단어가 일상에서 가볍게 쓰이듯이 행복 역시 거창한 것이 아니다. 마음을 채울 정도의 소소한 기쁨. 그것들이 쌓이면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조차도 발견하지 못하면 행복을 놓치게 된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작은 공원의 허름한 벤치에 앉아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있던 그 순간만큼은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행복은 목적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걷는 과정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그 흔한 진리를 이제야 진심으로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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