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다시, 나의 봄> 마지막 화.
12화. 따뜻한 봄이 지나간 자리
지훈의 메일을 받고 수개월이 지난 지금,
복자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 느낌 느껴본 적이 있다.
‘그래.. 나는 그때 바싹 마른 낙엽 같았지.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죽음이 가까워지는 것 같었어. 그래.. 그랬었지.‘
의사 선생님은 “이제는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라는 말로 마지막 경고를 전했지만,
복자는 담담했다. 아니, 담담해지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병실 창밖에는 벚꽃이 피어 있었다.
5년 전, 봄으로 돌아온 그날도,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지.
그날의 복자는 죽음을 앞둔 노인이었고,
지금의 복자는 삶을 다 산 한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시간을 되돌아왔는데 왜 더 빨리 죽느냐고 억울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복자는 아니었다.
완벽. 하다고는 하지 못해도,
그냥 늙은 지난 삶보다,
진심으로 살아온 지금의 짧은 삶이 더없이 감사했다.
“그래… 이번엔 나, 정말로 잘 살았어.”
병실 한편,
복자의 일기장 위엔 딸이 조심스럽게 꺼내 둔 복자의 유튜브 채널 페이지가 띄워진 태블릿이 있었다.
복자의 얼굴이 담긴 영상 썸네일들이 조용히,
그리고 찬란히 웃고 있었다.
⸻
며칠 전, 복자는 지훈을 만났다.
생각보다 더 많이 어른이 된 얼굴이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지훈의 말에는 아직 복자의 강아지가 여지없이 드러났다.
“할머니. 이게 머야.. 건강하기로 나랑 약속했잖아...”
지훈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흐르지 않았다.
애써 참아가며 복자의 얼굴, 몸을 이리저리 점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엔 오래 앓은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우리 강아지. 이리 와. 할머니가 안아보자.”
복자의 병실엔 해가 기울기 시작한 오후의 햇살이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얇은 커튼 사이로 비쳐드는 빛이 벽에 고요한 무늬를 남겼다.
의료 기계들의 규칙적인 신호음이 병실 안을 채웠고,
그 사이사이로 짧은 숨을 들이쉬는 복자의 숨결이 따라붙었다.
지훈은 복자의 침대 곁에 놓인 의자에 앉아,
손등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고 있었다.
복자의 손은 예전보다 많이 마르고,
힘이 빠져 있었지만 지훈이 느끼는 체온은 여전히 따뜻했다.
“우리 할머니… 손이 참 작았네.”
지훈이 조용히 말했다.
손끝을 가볍게 문지르며 그 위로 몇 번이고 시선을 떼지 못했다.
복자는 살짝 웃음을 머금었다.
입꼬리는 천천히 올라갔고, 눈가엔 다정한 주름이 깊어졌다.
“작긴… 너 태어날 땐 이 손으로 씻기고, 기저귀도 갈았어.
우리 지훈이 엉덩이, 내 손이 다 기억하지.”
지훈은 웃다가도, 이내 울컥해졌다.
목울대가 크게 들썩였지만, 울음을 끝까지 삼켰다.
“할머니. 진짜… 이러면 안 되잖아. 건강하기로 했잖아.
유튜브 계속하기로 약속했잖아.
나도 돌아왔는데…”
복자는 천천히 지훈의 손을 더 꼭 잡았다.
그 힘은 약했지만, 마음은 단단히 실려 있었다.
“우리 강아지, 돌아와 줘서 고맙다. 그래도 네가 다시 보고 가서… 참, 다행이야.”
복자는 눈을 감은 채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이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지훈아, 살아보니까…
우리한테 주어진 시간은 늘 예고 없이 짧아.
그러니까 용기 내서 살아.
사랑도, 일도, 삶도… 주저하지 말고.”
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복자의 이마에 이마를 살짝 맞댄 채, 조용히 속삭였다.
“할머니, 난 아직도 두려워.
여자친구 다시 만나도 똑같이 아플까 봐. 또 무너질까 봐…”
복자는 힘겹게 눈을 떴다.
지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해. 다시 아프더라도, 그게 사랑이면… 그건 살아있는 증거야.
할미는 그게 참 좋더라. 사랑하고 또 아파보고..
그러니 네가 살아가는 날들에, 그게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어.”
그 말에 지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복자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할머니, 그런데 아직은 아니야..”
복자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나 이제… 부끄럽지 않게,
네 할아버지 만나러 갈 수 있겠어.
그리고 참 많이 보고 싶어.”
그 말은 바람처럼 병실 안을 감쌌고,
지훈은 눈을 감고, 복자의 손을 다시 한번 꼭 쥐었다.
병실 안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두 사람 사이엔
생의 마지막에만 도달할 수 있는, 깊은 사랑의 침묵이 흘렀다.
⸻
딸과 사위도 병실을 찾았다.
복자의 시선이 천천히 딸에게 닿았다.
“우리 딸.. 내 공주님.
엄마가 참 미안했어.
내 딸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거야.
너도 너 나름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엄마는 아직 엄마의 세상에 네가 있는 줄 알았어.
우리 딸 마음 몰라줬던 것 같아서 엄마가 참 미안해”
은희의 눈에서 눈물 방울이 계속해서 떨어졌다.
억지로 울음을 참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은희의 등을 남편이 슬쩍 밀어 복자와 은희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오랜만이다.
엄마의 눈동자를 보는 것이.
오랜만이다.
딸의 눈동자를 보는 것이.
서로의 세상을 바라보듯 둘은 서로의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복자의 눈가에 주름이 졌다.
복자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퍼졌다.
“우리 공주,”
복자의 손이 은희의 한쪽 뺨을 어루만졌다.
엄마의 손의 촉감이 거칠었지만
은희는 거칠고, 따스한 엄마의 손에 얼굴을 기대었다.
결혼식 때까지도 ‘공주’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대학교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왔을 때도
아빠, 엄마가 자신을 ‘공주’라고 부른 탓에
친구들이 한동안 학교에서도 ‘공주’라고 놀렸었다.
아빠 엄마는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이상하게 ‘공주’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다.
나중에 그 이유를 물어보니 사위의 입장에서
처가에서 그런 식으로 부르면 부담스러울까 봐 조심하기로 했다는 거다.
이해가 되기도 했고, 내심 서운하기도 했다.
“아니야, 엄마.
나도 그동안 너무 엄마한테 쏟아내기만 했던 것 같아.
이제야 알겠어.
아빠 엄마가 우리 모두를 얼마나 깊게 사랑해 왔는지.”
잠시 침묵이 흐르고, 사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머니.
이 사람, 그리고 지훈이 너무 걱정 마세요.
제가 아버님만큼은 아니겠지만,
이 사람 더 많이 사랑해 주고,
지훈이는 어머님이 이 사람한테 그러셨던 것처럼
늘 곁에서 길잡이가 되겠습니다.
예전에 제가… 지훈이 일로, 너무 꽉 막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압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게 얼마나 큰 용기인지요.
지훈이한테도, 정말 고맙고 자랑스럽다고 꼭 전하고 싶었어요.”
복자는 조용히 웃었다.
“늘 고마워. 자네가 있어서 참 고마워.”
복자의 눈에 눈물이 고였지만,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그건 눈물이 아니라, 오래된 후회가 비로소 안녕을 고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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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복자의 병실에는 마지막 침묵이 깃들었다.
복자는 아주 조용히, 잠들듯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은, 딸의 품 안에서 속삭이듯 흘렀다.
“가서…
이제는 정말 그 사람을 만날 수 있겠지?”
딸은 복자의 손을 가슴에 안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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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복자의 유튜브 채널엔 한 편의 영상이 올라왔다.
썸네일엔 복자의 웃고 있는 모습과, 제목 하나.
《복자 할머니의 마지막 인사》
영상은 조용히 시작됐다.
그리고 익숙한, 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복자 할머니의 손자, 지훈입니다.
이 영상은…
할머니의 마지막 부탁으로 남깁니다.
복자 할머니께서… 며칠 전, 평온하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할머니를 기억해 주시는 한, 할머니는 여전히 우리 곁에 계실 겁니다.
할머니는 늘 말했어요.
‘진심은 언젠가 닿는다.’
‘흉터는 남지만, 흉터도 삶이다.’
이 영상을 보시는 여러분 한 분 한 분께…
할머니의 삶이, 마음이, 따뜻한 봄처럼 닿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할머니.
손자 지훈이는 이제 정말 사랑이 뭔지 알 것 같아.
할머니가 해줬던 말처럼,
나도 이제 누군가의 겨울을 함께 견디고,
봄까지 걸어가고 싶어.
정말, 정말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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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상의 댓글란은 수많은 ‘안녕’과 ‘감사합니다’로 가득 채워졌다.
복자의 이야기로 시작된 따뜻한 변화는,
다시 누군가의 봄이 되어 피어나고 있었다.
<다시, 나의 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