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_11화. 다시 마주하는 마음

소설 <다시, 나의 봄> 11화

by 미소 달

11화. 다시 마주하는 마음

복자는 오늘도 여느 때처럼 카메라 앞에 앉았다.

하지만 렌즈 너머로 보이는 얼굴엔 조금 더 고요한 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복자입니다.”

익숙한 인사. 그러나 어딘가 다정하면서도 느리게, 깊이 감겼다.

“요즘은 몸이 조금 피곤하네요. 계절 탓일까요. 아니면… 나이 탓일까요.”

말끝에 살짝 웃음이 실렸다.

그녀의 앞엔 늘 그러했듯 남편의 일기장과 따뜻한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창밖으로, 햇살이 묵직하게 흘러들었다.

복자는 카메라를 끄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이제는 알고 있다. 사람의 생에는 마지막 페이지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페이지는 조용히 다가온다는 것을.

병원에서 돌아온 그날, 복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딸에게도, 유튜브 영상에도, 일기장에도.

단지 오래도록 침묵한 채로 바람이 드는 거실 창을 내다봤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입에서 나지막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아, 여보.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시간을 거슬러도 아쉬움은 여전했다.

그 말은 바람결에 실려 흩어졌고, 복자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며칠 뒤.

딸은 조심스럽게 복자에게 물었다.

“엄마, 컨디션은 어때?”

복자는 웃으며 고개를 딸이 있는 쪽으로 돌렸다.

“좋아. 아주 좋아.”

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가만히 엄마의 웃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래도록, 말없이 있었다.

그날 밤, 복자는 일기장을 펼쳤다.

그녀의 글씨는 여전히 정갈하고 또렷했다.

“조용한 죽음은

누군가에겐 이별이지만

나에게는, 기다림의 끝이다.”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

어쩌면.. 조금.. 설레는 느낌이에요.”

며칠 뒤, 지훈에게서 또 한 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할머니.

런던에 온 지 벌써 1년이 지났네.

이게 참 이상해. 처음엔 하루하루가 낯설고 버거웠는데,

어느 날부터는 지하철 노선과 시간을 보지 않아도 탈 수 있고,


마트에서 할인하는 요일을 기억하고 있더라고.

다 살아지는 건가 봐.

일도 점점 재미있어지고 있어.

특히 지난달에 프로젝트 발표했을 때 칭찬받았는데,

그날 저녁엔 정말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나더라.

아, 할머니가 “우리 강아지 참 잘했네”라고 말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했어.

런던 날씨 때문인가..

어제는 집에 오는데 유난히 텅 빈 느낌이 들었어.

사실 1년간 잘 지내면서도 그 공허한 느낌이 따라다녀.

이유는 아는데 이게 외면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카페에 혼자 앉아 있다가,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게 되고,

헤어진 그날이 떠올라버려.

이젠 ‘보고 싶다’는 말보다

‘미안했다’는 말을 진심으로 하고 싶어.

내가 너무 어려서,

너무 조급해서,

그 애를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어.

가끔은 연락해 볼까, 번호를 누르다가 지웠다가

또 누르다가…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못해.

할머니.

사랑이라는 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라면…

용서를 구할 수 있다면…

그때보다는 좀 더 책임감 있는 모습으로

그 애를 마주하고 싶어.

그래서 요즘엔,

더 늦기 전에,

다시 진심을 전해볼까 생각하고 있어..

그 애가 아니면 안 된다. 이기보다,

이젠 내가 그 애의 곁에서 ‘힘이 되어주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할머니가 그랬잖아.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작은 집이지만 따뜻하고 튼튼한 집이었다고.

그때는 그랬구나. 하고 넘겼는데

그게 참 대단한 일이란 걸 새삼 느끼게 돼.

내가 보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늘 서로를 보고 웃는 모습이었어.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놀리기 바빴지만..ㅎ)

그때 생각나니 나도 모르게 기분 좋게 웃고 있네.

나는 참 이상하게도 이런 이야기는 할머니한테 제일 먼저 하게 돼.

친구들한테도 잘 안되더라고.

할머니가 늘 얘기해 줬잖아.

“진짜 사랑은, 두려워도 손을 내미는 거야.”

…그 손, 내밀어볼래.

우리 복자 할머니.

사랑하고, 또 보고 싶어요.

그리고 할머니,

꼭 건강 챙겨야 해.

약속이야!

또 러브레터 쓸게. ㅎㅎ

— 지훈 드림

복자는 천천히 이메일을 읽고, 가만히 손으로 화면을 덮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그래. 내 강아지가 사내가 되어가는구나..”

며칠 뒤, 복자는 카메라 앞에 앉았다.

오늘은 배경도 정갈하게 정리하고, 오래된 꽃무늬 블라우스를 꺼내 입었다.

“안녕하세요, 복자입니다.”

그녀는 환히 웃었다.

마치 오랜만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인사하는 얼굴처럼.

“오늘은, 책임이라는 단어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요.”

복자는 지훈에게 쓰는 마음으로,

그리고 자신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를 꺼내듯,

말을 이어갔다.

“어른이 된다는 건, 누군가의 손을 꼭 잡고 ‘괜찮다’ 말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손을 놓지 않겠다는 다짐을 책임이라 부르기도 하죠.”

그녀는 마지막으로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그리고 따뜻하게, 그리고 기도하듯 말했다.

“당신의 용기를 지지합니다.

당신의 책임이 당신의 행복의 성장에 발판이 될 거란 걸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랑이, 부디 끝까지 가닿기를.”

카메라가 꺼졌다.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나 복자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환했다.

지훈에게, 딸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그녀는 이제, 후회 없이 말할 수 있었다.

“여보. 보고 싶어요. 이제는 부끄럽지 않게 당신을 만나러 갈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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