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_ 10화. 나이 든 꿈, 아직 늦지 않았다

소설 <다시, 나의 봄> 10화

by 미소 달

10화. 나이 든 꿈, 아직 늦지 않았다

복자는 오늘도 천천히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코끝을 스치더니,


먼 나뭇가지 사이에서 노란 새 한 마리가 짧은 울음을 남기고 날아갔다.

“날씨가 풀리려나 봐…”

혼잣말을 하며 찻주전자를 올리고, 텅 빈 거실을 한 바퀴 돌아보다가, 조용히 삼각대를 펼쳤다.

카메라 앞에 앉는 자리가, 이제는 복자의 작은 무대 같았다.

렌즈 너머에선 누군가가 복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복자는 다시 말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복자입니다.”

살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그냥… 제 하루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별일 없는 날이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서요.”

복자는 어제 있었던 작은 이야기를 꺼냈다.

아파트 단지 2동 아주머니와의 우연한 만남.

“며칠 전에, 장 보러 가다가 2동 사시는 아주머니를 마주쳤어요.

그분이 절 보더니 이러시는 거예요.

‘복자 씨죠? 나 요즘 복자 씨 영상 보면서 울다가 웃다가 해요.

아, 우리 집 애들도 다 알아요. 그… 영상 속 힐링 할머니라고.’”

복자는 소리 없이 웃으며 찻잔을 살짝 흔들었다.

“그날, 그 아주머니랑 근처에서 차 한 잔 했어요.

처음엔 어색했는데, 먼저 마음을 열고 말씀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그 이야기를 하면서 복자의 눈엔 진짜 ‘삶’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분이 그러시더라고요.

요즘 세상엔 말이 많은데, 정작 누구랑도 ‘진짜 얘기’를 나누지 않는 것 같다고.

그래서 제 영상이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누군가 그냥 가만히 옆에 앉아주는 것 같다고요.”

복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카메라를 잠시 응시했다.

렌즈를 통해 그 아주머니의 얼굴, 지훈의 얼굴, 북카페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이 지나갔다.

“전 이제야 남편의 일기장에 그 문장을 이해할 것 같아요.

‘우린 결국 사람 사이에 머물다 가는 거야.

그 분위기가 결국 내가 되는 거야.‘

라고 적혀있었어요.

제 주변을 둘러보니 여느 사람과 같더라고요.

자식과의 관계, 손주와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그런데 한 스푼.

‘진심’ 한 스푼을 담아 살아가려 하니 조금씩 따뜻해지더라고요.

그건 나에게도 마찬가지였어요.

누구의 할머니, 누구의 엄마가 아닌

정말, 나, ‘복자’에게도 진심 한 스푼을 담으니 또 조금 더 따뜻해지더라고요. “

영상 촬영을 마친 후, 복자는 이웃들과의 차모임 약속을 떠올리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입원실에 누워있던 남편이 해주던 말이 떠올랐다.

“복복아. 나는 우리 복복이가 따뜻해서 참 좋아.


밖에서 일이 힘들어도 집에 빨리 오고 싶은 이유였어.


복복이가 활짝 웃으며 ‘다녀왔어요? 오늘도 수고 많았어요.’하고 안아주면


밖에서 힘들었던 일이 ‘그래, 해결될 일이야.’라는 생각이 덮어주더라고.


우리 따뜻한 복복이.”

그때를 떠올리는 복자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지만 눈가는 촉촉해져 갔다.

복자는 영상 편집을 끝내고 잠시 후, 휴대폰으로 댓글을 하나씩 읽었다.

그중 눈에 띄는 한 줄이 있었다.

“복자님, 혹시 작은 동네 강연 같은 거 해주실 생각 없으세요?

실버센터에서 작은 강연을 준비 중인데, 많은 분들이 복자님의 삶을 듣고 싶어 해요.”

복자는 잠시 멈칫했다.

‘강연이라니… 내가 그런 걸 해도 될까?’

하지만 곧 웃었다.

‘그래. 이것도 도전이지. 못한다고 하면 한도 끝도 없어. 해보자. 해봐.’

실버센터 강당 안은 잔잔한 웅성임으로 가득했다.

의자에 앉은 백발의 어르신들 사이로, 복자가 조심스레 단상 위로 올라섰다.

마이크가 키 높이에 맞춰지자, 스피커에서 작게 피드백이 났고,

복자는 순간 움찔하며 긴장된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복자라고 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 가볍게 웃음과 박수가 터졌고, 복자는 숨을 들이마셨다.

“나이는… 예순아홉이고요.

작년까지만 해도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살아있더라고요.”

청중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복자는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마음속에선 지금도, 남편이 손을 꼭 잡아주는 듯한 감각이 살아 있었다.

“어느 날,


저 스스로를 가을의 끝자락의 낙엽 같다고 생각을 했어요.


살아온 날들이 지나가면서 ‘후회’라는 단어하나가 떠오르더라고요.


‘다시 살면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다들 아시잖아요.


어떻게 해도 ‘후회’는 하게 되어있다는 걸.


그런데 덜 후회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였어요.


다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게.”

조용한 강당에 복자의 말이 차분하게 퍼졌다.

마치 따뜻한 물이 찻잔을 가득 채우듯.

“손자 덕분에 유튜브를 시작했어요.

이 나이에… 말도 안 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건 저한테 어려운 일이고, 새로운 일이었지만, ‘숨 쉴 구멍’ 같은 거였어요.”

복자는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마치 비밀을 이야기듯 손도 입으로 가져갔다.

“어떤 날은요, 조회수가 8이더라고요.

하나는 제가 한 거고, 나머지는 아마도 손주가 한 거겠죠.

근데 그 8이란 숫자도 기적처럼 느껴졌어요.”

뒷줄에 앉아있던 한 어르신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에이고… 우리 손주들은 그런 것도 안 해줘요.”

복자도 따라 웃었다.

그러나 이내, 눈동자에 따스한 정색이 감돌았다.

“우리 이 나이 되면 다들 이야기 하나쯤은 있으시잖아요.

숨겨둔 마음, 오래된 후회, 안타까운 고백…

근데 말이에요. 그걸 꺼내야, 누군가랑 닿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조금씩 다시 살아가고 있어요.”

그 말에 누군가는 고개를 숙였고,

누군가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레 눈가를 닦았다.

“오늘 여기 서 있는 이 순간.

그게 저한텐 가장 후회 없는 선택이에요.”

복자의 마지막 말이 조용히 울렸다.

단상 위 복자에게,

박수가 조심스레, 그러나 따뜻하게 퍼져나갔다.

저녁 무렵.

복자는 강연장에서 받은 꽃다발을 품에 안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왔다.

몸이 조금은 무거웠지만, 어쩐지 마음은 가벼웠다.

“이렇게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스스로 중얼이며 현관문을 열었다.

거실로 들어서니, 한기가 느껴지는 방 안에

햇빛이 뉘엿뉘엿 남아 있었다.

찻물을 올려놓고, 복자는 조심스럽게 노트북을 열었다.

익숙한 습관처럼 유튜브 댓글을 먼저 확인하다가,

메일함에 들어온 새 메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From: 지훈

Subject: 할머니. 런던에서.

복자의 손끝이 가볍게 떨렸다.

화면을 클릭하자, 익숙한 문장들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할머니, 잘 지내지?

여긴 이제 본격적인 겨울이야.

아침마다 김 나는 커피 잔을 손에 쥐고 사무실 창밖을 보면,

할머니 생각이 자주 나.

할머니가 보내준 머플러, 요즘 내 최애 아이템이 되어 버렸어.

할머니 손길 같아서, 이상하게 그게 이상하게 위안이 되네.

할머니, 벌써 런던 온 지 1년이 넘어가고 있어.

처음엔 매일이 낯설고 외로웠는데,

이젠 일도 많이 익숙해지고,

생각보다 일이 재미있는 것 같아.

이제 일이 익숙해지니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어.

가끔은 회사에서 일하다가 문득,

‘내가 뭔가 잘하고 있는 건가?’ 싶을 때가 있어.

그럴 땐 할머니 유튜브 틀어보지. ㅎㅎ

할머니 목소리 목소리는 뭔가 위안이 되면서 할머니 이야기에 마음이 안정이 된달까.

홈.. 할머니.

나, 아직도 그 애 생각이 나.

웃기지.

웃을 때, 눈이 쏙 접히던 얼굴.

코끝이 빨개질 때 웃으며 감추던 표정.

그때 놓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내가 더 단단했으면… 우리가 조금만 더 여유로웠다면…

그런 생각을 해봐. 되돌릴 수는 있을까..

(부모님한테는 비밀인 거 알지?)

요즘은…

연락을 해볼까 하는 마음이 자꾸 드는데,


막상 휴대폰을 들면 망설여지는 거야.

참.. 못났지?

할아버지는 어땠어?

왠지 할아버지는 멋졌을 것 같아.

할머니가 이야기해 준 이야기로는..

‘잘 지냈어?’ 그 말을 꺼내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든지..

혹시 나만 그때 거기 멈춰 있는 건 아닐까,

혼자 옛날 편지를 다시 읽고 있는 건 아닐까…

할머니는 항상 “사랑은 타이밍보다 용기야”라고 했잖아.

그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아.

근데 용기란 게,

가슴 뛰는 것보다 조심스러운 것부터 시작된다는 걸

요즘 들어 알 것 같아..

이런 마음을 담은 메시지를

할머니 한 테밖에 못 써서…

또 이렇게 길어져버렸네.

할머니.

늘 고맙고, 늘 그리워.

그리고… 많이 보고 싶어.

늘 건강 챙기고 지금처럼 즐겁게 지내고 있기야.

지훈 드림

복자는 메일을 다 읽고,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보았다.

두 손이 서서히 무릎 위로 내려왔다.

“지훈아… 우리 강아지… 잘 자라고 있구나.”

눈가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떨어질까 봐, 복자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녀의 입술은 다물려 있었지만,

마음속에선 아주 크고 깊은 응원의 기도가 맴돌았다.

그 순간,

창밖 하늘에 석양이 물들고 있었다.

노을은 꼭 누군가의 등을 조용히 밀어주는 손 같았다.

복자는 다정한 손길에 등을 살며시 기대며 속삭였다.

“우리 강아지.

할머니도 네가 참 고마워.”

그날 밤,

복자는 남편의 일기장 옆에 놓인 메모지를 꺼냈다.

“따뜻한 용기”라는 제목 아래,

지훈을 위한 새로운 영상 아이디어들을 조심스레 적기 시작했다.

그녀의 연필 끝에서,

또 하나의 봄이 싹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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