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다시, 나의 봄> 8화
《다시, 나의 봄.》
8화. 말하지 못한 이별
복자는 오늘도 익숙하게 카메라를 켰다.
테이블 위엔 전날 밤 미리 꺼내 둔 일기장과 찻잔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제는 화면 속 자신과 마주하는 일이 하루의 시작처럼 자연스러워졌다.
“안녕하세요. 복자입니다.”
늘 하던 인사였지만, 오늘따라 목소리에 더 따뜻한 온기가 묻어났다.
요즘은 댓글마다 이름을 익히고, 익숙한 닉네임엔 안부를 묻기도 했다.
유튜브는 어느덧 복자의 일상 속 ‘함께 살아가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어떤 날은 구독자가 늘지 않아도, 어떤 날은 댓글이 없어도 괜찮았다.
복자는 매일의 기록을 남기며 자기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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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엔 지훈이 집에 들렀다.
오랜만에 먹는 손수 만든 된장국에, 복자는 한 숟갈 뜰 때마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훈아, 얼굴이 더 반짝거리는 거 같네.”
“아유, 할머니. 요즘 햇볕이 좋아서 그래요.”
지훈은 여전히 복자에게 밝은 아이였다.
하지만 그날따라, 눈웃음 뒤로 아주 작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복자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요즘은… 여자친구는 잘 지내?”
지훈은 잠깐 젓가락을 멈추더니, 씩 웃었다.
“그냥… 뭐, 바쁘게 사는 거죠. 서로.”
그 짧은 대답에 복자는 더 묻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많은 걸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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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복자는 딸과 통화를 하게 되었다.
서로의 안부를 물은 뒤, 딸의 목소리에 작은 한숨이 섞였다.
“엄마, 지훈이 때문에 미치겠어.”
“왜? 무슨 일이야?”
“애가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나이가 이제 이십 후반인데 무슨 결혼을 한다고 그러잖아.
더군다나 여자애가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데.
그래. 그럴 수 있지.
사람 목숨이 뭐 정해진 건 아니지만..
엄마.
그래도 나는 내 아들은 처가에서 사랑받고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이게 잘못된 거야?”
딸의 목소리엔 지친 마음과 애틋함이 함께 묻어 있었다.
“지난주에 집에서 대판 난리가 났지 뭐야.
그때부터 이놈의 새끼가 말도 안 하고 부모를 아주 유령취급을 해.
그러더니 해외취업을 했다는 거야. 어후..”
복자는 가만히 입술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면 요즘 지훈이의 웃음엔 어디에도 들뜨거나 설레는 기색이 없었다.
마치, 마음 한쪽을 접고 조용히 숨기려는 사람처럼.
복자는 딸의 마음을 안다.
내 새끼, 소중한 내 자식한테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은 그 애틋한 부모의 마음이리라.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만 흘러가지 않는다.
좋은 환경에서도 고난이 생긴다.
아니, 그 좋은 환경이 되려 고난으로 이끄는 길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복자는 당장 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그리고 그날이 찾아왔다.
지훈은 작은 배낭 하나를 멘 채 복자 집 앞에 섰다.
계절은 어느덧 늦여름의 끝자락. 바람엔 가을의 냄새가 어렴풋이 실려 있었다.
“할머니, 저 가요. 2년 계약이긴 한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
“지훈아.”
복자는 지훈이의 손을 쓰다듬으며 지훈이의 착한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내 강아지.
복자도 내 하나밖에 없는 손주이기 때문에 모든 걸 주고 싶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걸 복자는 알고 있다.
정말 사랑이라고 생각해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확고히 좋은 길이라고 걸어도 그것이 진흙탕인 길이었구나. 하고 깨닫는 시간들이 있다.
그리고 정말 인연이라면 또다시 만나게 되어있다.
“우리 강아지.
할머니가 해 줄 수 있는 건 우리 지훈이 건강하길 바라고
마음이 다쳐도 잘 아물길 바라는 것 밖에 없어.
그리고 아픔이 있으면 숨기지 말고 그 감정에 솔직하게 마주해 봐.
나중에 흉터로 남겠지만 그 흉터로 인해 조금 더 단단해지더라.”
복자의 말에 지훈이의 눈이 흔들렸지만 애써 웃는 복자의 강아지, 지훈이었다.
“할머니, 영상 계속 올릴 거지?
자주 올려. 그래야 할머니 얼굴보지.
내가 다 확인할 거야. 게으름 부리기만 해 봐!”
지훈의 장난 섞인 말에 복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훈의 눈동자 속에서 무언가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그녀는 느꼈다.
“지훈아.”
“응?”
“고맙다.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
우리 지훈이랑 보내는 시간 덕분에,
내가 다시 살고 있는 것 같아서. 할머니가 참 고마워.”
지훈은 말없이 복자의 손을 꼭 잡았다.
말보다 따뜻한 온기가 손끝에 오래 남았다.
“할머니 아프면 안 돼. 진짜. 알았지?”
그 말을 끝으로 지훈은 돌아섰고, 복자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았지만, 참 많은 걸 안고 떠나는구나…’
복자는 문득 거울 앞에 섰다.
그곳에는 여전히 말간 눈빛을 지닌 자신이 있었다.
복자는 다시 카메라를 켰다.
그녀의 유튜브는 계속될 것이다.
삶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누군가의 하루를 여전히 따스하게 감쌀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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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이 떠난 날 밤, 복자는 테이블 위에 삼각대를 세워놓고 앉았다.
카메라는 꺼져 있었지만, 복자는 오랜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촬영을 하려던 건 분명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허전했다.
그제야 복자의 입에서 아주 조용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맞아.. 이런 일이 있었지. 다시 돌아와도 일어날 일들은 일어나는구나..”
지훈이 떠난 날이었다.
공항까지는 못 갔지만, 떠나기 전 그가 건넨 마지막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할머니 아프면 안 돼. 진짜. 알았지?”
그 말에 담긴 여러 감정들이 하나하나 마음에 박혀 있었다.
지훈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복자는 다 알고 있었다.
잠시 뒤, 복자는 손끝으로 천천히 일기장을 넘겼다.
그리고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
<회상>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며칠 전부터 졸라댔다.
“복복아. 우리 부모님께 인사 한 번만 드리자. 응? 너를 너무 보여드리고 싶어 미치겠어. 요즘!”
이상하게 남편은 만나고
6개월이 채 되지 않아 자꾸 자신의 부모님께 소개를 시키고 싶어 했다.
하지만 복자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1년이 넘는 시간을 사귀고 있었다.
복자보다 더 단호하고 강력한 건 남편의 ‘의지’였다.
복자가 이렇게 추운 날,
단정히 머리를 묶고 원피스를 입은 이유는 그 한마디 때문이었다.
지난주의 남편의 그 한마디.
“나는 너랑 결혼할 거야. 내 마지막 여자는 너라고.”
두꺼운 코트를 입었다 해도 추운 날이었다.
차라리 추운 날씨에 몸이 떨리는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복자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이런 남자를 만나고 부모님까지 찾아뵙는 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한 번쯤은 나도 다시 사랑받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그 양심을 치워버렸을지도 모른다.
18살에 부모님의 사고사로 홀로 남겨진 복자였다.
그전까지 집이 풍족하진 않았지만 부모님의 사랑만큼은 듬뿍 받고 자랐다.
그런데 그 사랑의 원천이 사라졌다. 한날한시에.
그 후의 건조한 삶에 이 남자가 나타나
부담스러운 일을,
어쩌면 바라고 바랬던 일을 저질러 버렸다.
“어! 복복! 왔어?”
직원이 소개해준 방으로 들어가니 남편의 부모님과 남편이 자신 쪽을 바라보았다.
일찍 온다고 왔는데 더 일찍 와서 기다렸나 보다.
복자가 방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부모님 두 분이 자리에서 일어나 복자 쪽으로 다가왔다.
차가웠던 몸이 담요에 덮이듯 감싸졌다.
어머님이었다.
“추웠지? 어서 와. 여보, 나 복자옆에 앉을래요. 당신 자리 옮겨 줄 수 있지요?”
분명 처음 보는 분들이었는데 남편의 부모님은 마치 알고 있는 사람처럼 친근하게 대해주셨다.
얼떨결에 어머님의 옆에 앉게 된 복자.
자신의 앞으로 맛깔나게 반찬을 모아주는 어머님의 행동에
어리둥절한 복자를 바보 같은 웃음을 짓고 바라보는 남편,
그 남편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아버님.
이런 분위기에 어떻게 자신의 이야기를 말해야 하나.. 고민하는 복자의 손을 어머님이 잡았다.
“영만이한테 들었어.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많이 힘들었지? 수고 많았다. 아가.”
두둑.
자신도 모르게 흘러내린 눈물이었다.
토닥토닥.
“그래. 얼마나 힘들었니. 아이고..”
그날 남편의 마음을 들었다.
늘 불안함을 느끼는 복자에게 안정감을 주고 싶었다고 했다.
자신의 부모님은 따뜻하리라는 믿음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부모님께 엄청 부자로 살아가지는 못하지만
따뜻한 가정은 꾸릴 수 있노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고 했다.
“복자”와 함께라면 할 수 있다고.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그날, 복자는 정말 오랜만에 얼굴에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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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는 카메라를 켜지 않은 채, 조용히 혼잣말을 뱉었다.
“나도… 그랬는데.
그 아이도 얼마나 외로웠을까…
지훈이도, 우리 딸도…”
그 순간, 많은 마음들이 동시에 복자의 가슴에 들어왔다.
딸이 지훈의 결정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도,
지훈이 자신의 사랑을 지키려다 겪은 상처도,
그리고 부모 없이 세상 앞에 섰을 지훈의 여자친구의 쓸쓸함도.
모두가 이해됐다.
그런데도 복자는 말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최선인 걸까…”
복자는 손을 가만히 모았다.
답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지혜의 힘을 달라고 작게 빌어보았다.
복자는 카메라의 전원을 켜지 않은 채,
다시 일기장을 덮었다.
그리고 조용히,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별빛 없는 밤하늘이, 오늘따라 더 깊고 고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