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9화_ 마음이 닿기를 바라는 날

소설 <다시, 나의 봄> 9화

by 미소 달

《다시, 나의 봄.》

9화. 마음이 닿기를 바라는 날

카메라를 켜지 않은 채, 복자는 테이블 앞에 오래 앉아 있었다.

앞에 놓인 노트북 화면엔, 지훈에게서 온 이메일이 떠 있었다.

‘할머니.’라는 제목.

단 세 글자였다.

복자는 익숙한 듯 마우스를 움직여, 이메일을 열었다.

할머니.

공항에서 비행기 타기 전엔 별 감정이 없었는데,


막상 도착하고 나니까 많이 멍하네. 이게 참 군대랑은 또 다른 것 같아.

하루 종일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있어도, 뭔가 혼자 있는 기분이야.

할머니,

나 사실 여자친구랑 헤어졌어.

뭐, 엄마한테 들었겠지만..

그래도 내가 할머니한테는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았어.

이게 좋은 선택이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

사실.. 많이 괴롭고 힘들어.

원래 이렇게 사랑이 힘든 건가..

요즘엔 나답지 않게 막 ‘사랑’에 대한, ‘인생’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거 같아.

어쩌면 그 질문의 답이 내 편이면 하는 어린애 같은 마음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할머니였으면 어떤 대답을 해줬을까. 하는 생각도 해봐.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조금 더 어른스러워지면


좀 더 큰 용기가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나도 부모님 마음은 이해해.

이해를 하지만 서운한 마음이 가시질 않아.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지도 알지만..

그래도 부모님을 탓하는 것 같아.

런던에 와서 일주일 동안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어.

할머니 품도 그립고..

나는 이상하게 할머니가 안아주면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

이런 거 보면 아직도 많이 애인가?

할머니.

오늘도 영상 찍어?

편집은 어때? 저번에 보니 많이 늘었던데.

할머니는 내 할머니지만 참 대단해.

이번에 취직도 할머니 영향이 컸어.

교수님이 제안하실 때, 조금은 망설였는데,

그때 즈음, 할머니가 동네주민센터 가서 영상편집 배우고 있다고 자랑했잖아.

그거 보고 ‘할머니도 저렇게 도전하는데 나도 도전하면서 살아보자.’하는 용기가 생기더라고.

이렇게 할머니한테 메일 쓰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진짜 우리 할머니는 이상한 할머니야.

생각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니까.

할머니가 그랬지?

나한테 고맙다고.

그건 내가 늘 할머니한테 하고 싶은 말이었어.

복자할머니!

손자 지훈이가 할머니를 정말 사랑해요.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

* 할머니.

오늘도 영상 찍을 거지?

찐 구독자의 부탁 좀 들어주세요!

할머니가 말하던 그 ‘따뜻한 용기’ 얘기.

꼭 좀 해주세요!

지금 어디선가 나같이 마음의 길을 잃은 청년들이 많지 않을까?

지훈 드림.

복자는 메일을 다 읽고도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노트북을 덮었다.

‘따뜻한 용기’

그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복자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삼각대를 세웠다.

카메라 전원을 누르자 화면이 밝아지며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안녕하세요, 복자입니다.”

오늘따라 목소리가 조금 더 조용했다.

하지만 그 조용함엔 한 겹 더 깊어진 진심이 실려 있었다.

“오늘은… 저의 첫사랑 이야기를 해보려고요.

그게, 어쩌면 지금 영상을 보고 계신 당신에게 닿을지도 모르니까요.”

복자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일기장을 펼쳤다.

“‘따뜻한 용기’라는 말을, 저는 오래전 제 첫사랑이자 남편에게 배웠어요.

‘겁이 나도, 그 마음이 사랑에서 비롯된 거라면, 그건 용기야.’

그 말이요.”

복자의 눈동자가 카메라 렌즈를 조심히 바라봤다.

마치 누군가의 눈을 직접 들여다보는 것처럼.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에요.

내가 믿는 옳음과 누군가의 옳음이 다를 때,

서로 손을 잡는 건 더더욱 어렵죠.”

복자는 잠시 시선을 거두고, 찻잔을 들었다.

따뜻한 김이 조용히 피어올랐다.

“그럴 땐 잠깐 멈춰서,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는지를

한 번만 생각해봤으면 해요.

마음을 닫기 전에, 질문을 던졌으면 좋겠어요.

‘혹시 그 사람도 나만큼 불안했던 건 아닐까.’

‘혹시 그 사람도 나처럼 사랑을 지키고 싶었던 걸까.’”

그녀의 손이 일기장을 조심스레 덮었다.

“저는 오늘도 누군가의 하루 끝에

조금의 위로가 되었으면 해요.

당신의 그 조용한 용기를, 저는 응원하고 있어요.”

촬영을 마친 복자는 조용히 카메라를 껐다.

방 안엔 다시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

복자의 마음은 따뜻한 무언가로 채워지고 있었다.

지훈에게,

그리고 이 세상의 수많은 ‘지훈’에게,

오늘 그녀의 목소리가 닿기를.

복자는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났다.

따스한 햇살이 거실 유리창 너머로 스며들고 있었다.

어젯밤 올린 영상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그녀의 마음은 묘하게 정리되지 않은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다.

‘괜찮았을까…? 너무 솔직했나…?’

걱정이 안 될 수는 없었지만,

그 영상은 누군가에게 닿아야 할 말이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조용히 물을 끓이고, 남편의 일기장 옆에 놓인 태블릿을 켰다.

댓글 알림이 여느 때보다 많았다.

그중 하나에 눈이 멈췄다.

“복자님, 늘 영상 잘 보고 있습니다.

저희 어머니랑 함께 봤는데, 오늘 영상은 특히 마음이 울컥했어요.

혹시… 한 번 시간 괜찮으시면 저희 동네 북카페에서 하는 작은 모임에 꼭 초대하고 싶어요!”

복자는 놀란 마음으로 천천히 화면을 넘겼다.

그 아래 이어진 또 다른 댓글.

“할머니 성함이 복자였군요.


같은 아파트 사는 주민인데 자주 보고 있습니다.


복자할머니 덕분에 많은 위로를 받고 있어요.


오다가다 얼굴 뵈면 인사드릴게요!”

복자는 손을 가슴 위에 얹었다.

말하지 못했던 것들이, 말없이 전해지고 있었다.

영상 속 목소리가 다가가 닿을 수 있다는 걸, 그녀는 이제 믿게 되었다.

복자는 북카페로 향하려고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래되었지만 복자가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연분홍색 스카프를 목에 둘렀다.

남편의 마지막 선물이기도 한 이 스카프는 오늘의 복자에게 필요한 아이템이었다.

가방에는 일기장 하나와 며칠 동안 정리해서 적어둔 메모장을 넣었다.

‘새로운’ 모임에 가는 일이 이토록 긴장되는 일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그런데 가방을 챙기는 그때,

띠리릭-

현관문이 열렸다.

“엄마, 잠깐만. 나도 같이 갈게.”

딸이었다.

“갑자기 웬일이야? 너 회사는?”

“하루 휴가 냈어. 엄마는 진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 모임에 덥석 가겠다고 하질 않나,


연락처 하나 믿고 따라간다 그러질 않나.


사기꾼이면 어쩌려고 그래?”

복자는 피식 웃었다.

“사기꾼은 무슨..


그런 걱정은 이제 네 몫이야?


걱정은 엄마가 하는 거야.”

딸은 눈을 흘기며 복자의 스카프를 다시 고쳐 매어주었다.

“엄마는 진짜… 세상이 만만해 보이냐?


요즘은 좋은 사람만 있는 세상 아니야.”

잔소리는 이어졌지만, 복자는 그 말들이 고마웠다.

누군가 걱정해 주는 존재가 있다는 건,


지금 자신이 살아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 같아서.

북카페는 조용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작은 공간이었다.

책장마다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책들이 가득했고,


천천히 흐르는 피아노 음악이 어색함을 덜어주고 있었다.

“복자 님, 오셨어요?”

카페 주인이 다가와 반갑게 인사했다.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이쪽이에요.”

복자는 딸과 함께 안쪽 테이블로 안내받았다.

딸은 여전히 경계하는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지만,


분위기가 조용하고 다정하다는 걸 금세 느꼈다.

잠시 뒤, 작은 의자들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각자 손에는 복자의 영상을 보고 적어온 메모, 일기장, 혹은 종이컵에 담긴 따뜻한 커피가 들려 있었다.

모두들 다정하게 복자에게 인사를 해주었고,

복자도 오랜만에 설레는, 그리고 환한 미소로 모두에게 인사를 했다.

복자는 살짝 긴장하며 준비해 온 메모를 꺼냈다.

“저는… 그냥 제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누군가 그 이야기를 듣고, ‘나도 하루를 버텨볼게요’라고 말해주셨을 때…

정말, 제가 살아있는 이유를 찾은 것 같았어요.”

이어지는 복자의 말들에 몇몇 참가자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어떤 이는 눈가를 닦았다.

“우리가 늙어가는 게 아니라, 다시 피어나는 거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이 시간은, 우리 안의 봄을 다시 맞이하는 계절 같아요.”

복자의 말이 끝났을 때, 아주 조용한 박수가 퍼졌다.

딸은 그 모든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이 알던 엄마는 늘 집안일에 치이고,


멍하니 시간을 그저, 보내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말하고 있고,


그 이야기들로 많은 사람들과 마음을 함께하고 있었다.

모임이 끝난 뒤, 둘은 차에 올랐다.

조용한 차 안, 운전하는 딸은 조용히 복자에게 말했다.

“엄마… 나, 오늘 엄마가 조금 다르게 보여.

그동안 내가 알던 엄마보다, 훨씬… 따뜻하고 멋져.”

복자는 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더 따뜻하게 대답했다.

“나도 오늘 네가 참 고마웠어. 너랑 함께여서, 더 든든했거든.”

조금 열어둔, 차창으로 겨울 초입의 찬바람이 불어왔지만, 그 속에서도 복자의 볼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오랜 시간 묻혀있던 복자의 내면이, 조금씩 빛을 향해 나오고 있었다.


keyword
화, 금 연재
이전 08화소설_ 8화. 말하지 못한 이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