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마지막 날. 추석 연휴를 맞이하여 우진과 우진의 어머니는 미래를 포함한 산속 집의 식구들을 집으로 초대하였다. 우진의 집으로 가는 산 아래 길엔 운무가 자욱이 깔려 있었다.
“손잡아 줄까?”
다소 거친 내리막길에 다다랐을 때, 초록이 해음을 돌아보며 말했다. 해음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음은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초록은 추석 연휴 내내 해음의 마음이 가라앉아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돌아가신 어머니 때문일 것이라 짐작했다.
“유난 떨지 말고 너나 조심해서 내려가.”
미래의 목줄을 잡고 내려오던 란이 초록을 흘겨보며 말했다. 초록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해음을 응시하였다.
“힘들면 말해. 알았지?”
“안 힘들어. 어서 가자, 늦겠다.”
해음이 슬쩍 입가를 올려 보인 뒤 초록을 앞질러 홀로 미끄러운 흙길을 내려갔다. 초록은 해음을 따라가다 문득 걸음을 멈춰 섰다. 안갯속으로 묻혀가는 해음의 뒷모습이, 마치 사라질 듯 아득하게 느껴졌다. 불현듯 두려움과 슬픔의 연기가 겹겹이 스며들어, 초록의 마음속에 안개처럼 깔렸다.
밝은 보름달이 떠오르기 전, 해음과 초록의 그림자는 더 짙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어서 와요.”
우진의 어머니가 환히 웃으며 이제 막 도착한 손님들을 맞이했다. 뒤이어 우진이 앞치마를 두르고 부침개를 든 모습으로 뛰어나왔다.
“미래 왔구나!”
미래가 열심히 꼬리를 흔들며 우진과 인사를 나누었다.
“야. 나도 왔다고.”
란이 우진을 째려보며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어제까지 연락했잖아.”
우진이 란을 향해 스스럼없이 웃어 보이며 답했다.
“변했어…변했어…….”
란이 중얼거리며 우진의 어머니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어 모두 다 같이 우진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식탁 위엔 명절 음식이 소박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해음은 명절마다 엄마와 함께 맡았던 익숙한 냄새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곧 화목한 모습으로 명절 음식을 차리고 있는 우진과 우진의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자, 해음아.”
초록이 덩그러니 서 있던 해음의 손을 잡고 음식이 차려진 쪽으로 이끌었다. 초록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해음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시린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 찾아오면, 초록도 더 이상 자신과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그때가 되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거나 완전히 소멸해 버릴 것을.
어느덧 해가 지고 보름달이 환히 떠올랐다. 식사를 마친 우진의 집에선 웃음과 이야기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해음은 그 속에서 웃고 말하고 멍하니 앉아 있는 일을 기계처럼 반복했다. 행복했지만, 공허했다. 서서히 예전처럼 암흑의 미로 속에 홀로 갇혀 갔다.
해음은 잠시 자리를 빠져나와 마당에 있는 미래 옆에 자리 잡았다. 미래가 해음을 위로하듯, 해음의 무릎에 기대어 자신의 온기를 나눠주었다. 해음은 고요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동그란 보름달이 아름답게 자기만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해음이 무의식적으로 몸을 일으켜 대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해송마을의 첫 번째 목적지였던 곳을 향해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저 하늘에 더 가까이 닿기 위해.
이윽고 도착한 절벽 위에서, 보름달은 더욱 환히 해음의 모습을 비추었다. 해음은 따스한 달빛 속에서 두 눈을 감고 조용히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들었던 파도 소리와는 달리 차분하고 부드러웠다. 해음은 크고 깊은 호흡을 들이쉬고 내뱉었다. 분명 해음은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다만, 홀로 감내해야 하는 감정들이 해음의 마음속에 여전히 선명하게 존재했다.
“해음아-!”
자신을 찾는 익숙한 목소리에 해음은 서서히 감았던 두 눈을 떴다. 그리고 뒤를 돌아 찬찬히 눈앞을 응시하였다. 깜깜한 밤하늘 아래, 또다시 유일한 별빛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너 설마…….”
사람이 된 초록에게서 처음 보았던 그 표정이, 다시금 달빛에 비춰 해음에게 또렷이 전달되었다.
“…나 좀 여기서 꺼내줘, 초록아.”
해음의 두 눈동자가 차가운 눈물로 가득 채워졌다. 초록은 성큼성큼 다가와 해음을 힘주어 껴안았다. 해음과 초록 사이에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숨 막혀.”
해음이 초록의 품에 묻힌 채 나직이 말문을 열었다.
“너 또 다 놓아버릴 거잖아.”
“그럴 일 없어. 너 살려야지.”
초록이 안고 있던 팔을 풀고 고개 숙인 해음의 볼을 어루만졌다. 해음을 내려다보는 초록의 두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어둡게 일렁였다.
“다신 그러지 마. 나한테 넌 이 세상 전부야.”
“…뭐야, 오글거려. 너 누구한테 그런 말 배웠어.”
해음이 고갤 들어 괜스레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초록은 그제야 해맑게 안도의 웃음을 터트렸다.
“보여줄 게 있어.”
초록이 덥석 해음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뭔데?”
“가보면 알아.”
두 사람은 함께 깜깜한 수풀 속을 헤쳐나갔다. 해음은 싸늘한 밤공기를 맞으며 초록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무성한 풀잎과 나뭇잎들로 뒤덮인 곳에 멈춰 섰다.
“여기가 어디…”
풀잎과 나뭇잎을 가르며 안으로 들어선 해음이 말문이 막힌 채 멍하니 눈앞의 광경을 응시했다. 수많은 반딧불이 어두운 숲을 영롱한 빛으로 수놓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마주한 황홀한 풍경에 해음은 마음을 빼앗겼다.
“맘에 들어?”
초록이 해음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응. 정말 예뻐.”
해음의 까만 눈동자가 작은 빛들로 가득 채워졌다. 초록은 그런 해음의 모습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속으로 되뇌었다.
‘넌 숲이고 빛이야. 그러니까 해음아…제발 사라지지 마.’
“앞으로 마음이 어두워질 때마다 지금 이 순간을 꼭 기억해 줘.”
“응, 그럴게. 고마워, 초록아.”
해음과 초록은 둘만의 공간에서 함께 웃음꽃을 틔우며, 숲이 품은 빛과 향에 빠져들었다. 마치 꿈과 영원을 맞이하듯이.
돌연히 해음이 두 눈을 꼭 감은 채 손을 모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초록이가 이 세상에서 잊히지 않게 해 주세요. 부디 초록이와 함께한 모든 시간을 가져갈 수 있게 해 주세요.’
“소원 빌었어?”
“응.”
“나도 빌어야지.”
이번엔 초록이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부디 시간이 우리를 비켜 가게 해주세요.’
애틋한 초록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해음과 초록을 관통하는 시간은 멈추지 않은 채 무심히 계속해서 흘러갔다. 2023년 12월 5일, 끝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