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계절] 빛(10)

by 지수

우진의 어머니가 눈을 뜬 지 1시간 후, 우진이 드디어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초록은 우진의 상태를 의료진과 해음에게 전해주기 위해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이제 막 눈을 뜬 우진의 흐릿한 시야에 꿈속의 여자와 닮아있는 어제의 여자아이가 보였다.

“괜찮아?”

란이 우진을 찬찬히 살펴보며 물었다. 우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 바보야? 엄마가 죽자고 했다고, 진짜 같이 죽으려 하면 어떡해.”

“…….”

“세상이 등을 돌리면, 네가 고개를 들어야지. 그래서 끝까지 앞을 보려 했어야지.”

“너무…너무 힘든데…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 그리고…늘 나보다 더 힘들어하는 엄마를 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엄마 말을 들어주고 싶었어. 나 때문에 엄마가 그렇게 됐으니까……. 그래서 그냥, 이대로 엄마랑 함께 죽고 다시 태어나야겠다고 생각했어.”

우진이 처음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 보였다. 그 말에 란은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이십 대의 진이 아닌 십 대의 우진임을 새삼 깊이 실감하였다.

“정말 바보 맞네. 그게 왜 네 탓이야. 그리고 뭐? 죽고 다시 태어나? 누가 다시 태어나게 해 준대?”

“…….”

“정신 똑바로 차리고 어떻게든 살아가. 그게 오늘 널 구해준 이들에게 주는 최고의 보답이 될 테니까.”

란은 애써 우진을 향한 애틋한 연민의 감정을 감추고 매몰차게 조언했다. 그리고 서서히 몸을 돌려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해일처럼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연민도, 책임감도 아닌 온전히 그의 슬픔을 함께 품고 싶은 마음이었다.

“김우진.”

란이 여전히 우진을 등진 채, 처음으로 우진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응.”

“넌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돼. 지금까지 충분히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 해낼 거야.”

말을 마친 란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 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진이 힘주어 답했다.

“고마워. 이 옷도, 위로도. 언젠가, 여름이 다시 찾아오면…바다 보러 가지 않을래? 연노란색 꽃이 피는 바다로.”

란이 걸음을 멈춘 뒤 고갤 돌려 글썽이는 두 눈으로 우진을 응시했다.

“그래…보러 가자. 그 바다.”

란이 눈물을 떨어뜨리며 우진을 향해 미소 지었다. 우진 또한 란을 따라 잔잔히 웃음 지었다.



그날 이후, 우진과 우진의 어머니는 차츰 둘만의 일상을 만들어 갔다. 우진은 자신의 꿈을 찾아가기 시작하고, 우진의 어머니는 자신의 꿈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둘만의 속도로 잃어버렸던 빛을 되찾아갔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삶 속으로 나아갔다. 현실이라는 거친 경기장 속으로, 어쩌면 만인에 대한 투쟁을 위해.

그들을 바라보며, 해음은 간절히 소망했다. 투쟁의 끝자락에서 보란 듯이 승리의 깃발을 흔들 수 있기를. 부디, 그 끝이 그들이 꿈꾸는 낙원으로 이어지기를.



9월 말, 우진이 산속 집을 찾아와 해음과 초록 그리고 란을 학교 운동회에 초대하였다. 운동회 계주로 뽑힌 우진의 얼굴은 평소 차분했던 모습과 달리 들떠있었다. 모두가 기뻐하며 우진의 초대를 받아들였고, 다 함께 운동회에 참석하였다.

운동회 날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맑고 쾌청했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우진의 어머니와 나란히 자리를 잡은 셋은 출발선에 서 있는 우진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우진은 다소 긴장한 기색을 띠고 있었지만, 총성이 울리자 거침없이 자신 앞에 펼쳐진 레이스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진심을 담아 우진을 열렬히 응원했다. 란은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내달리는 우진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 깊은 벅참과 뭉클함을 느꼈다. 전생의 진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머나먼 미래에 이르러 마침내 발견한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우진은 초록에게 가족 이어달리기에 함께 나가달라고 조심스럽게 부탁하였다. 초록은 흔쾌히 승낙하며, 장난기 있는 얼굴로 말했다.

“꼴찌 해도 원망하면 안 돼.”

잠시 후 초록은 온 힘을 다해 우진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 결과, 가장 먼저 배턴을 넘길 수 있었다. 그 기세를 이어받은 우진은 모두를 앞질러 결승선을 통과했다. 우진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초록에게 다가갔다.

“고마워요, 초록 삼촌. 덕분에 마음껏 달릴 수 있었어요. 그날…삼촌이 절 살려주신 거죠?”

초록은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난 단지 알아챘을 뿐이야. 그날 널 살린 건, 누군가를 애틋이 사랑해 주었던 과거의 너 자신이야.”

“네…?”

우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초록을 올려다보았다. 초록은 가만히 우진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천천히 입술을 떼어 말을 건넸다.

“우진아. 너의 과거가 너의 미래를 단정 짓도록 내버려 두지 마. 넌 네가 앞으로 맞이해야 할 수많은 미래를 바꾸고 개척해 나갈 수 있어.”

따가운 가을 햇살 아래 잔잔히 일렁이는 초록색 눈동자를 응시하며,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등 축하해, 김우진.”

초록이 싱긋 미소 지으며 우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어 우진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그들의 가족이 있는 곳으로 함께 걸어갔다. 그 순간, 초록은 미래와 붉은 실로 이어졌던 그때처럼, 자신과 우진의 오른 손목이 서로 연결된 것을 보았다. 초록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기뻐해 줄 해음을 향해 오른팔을 세차게 흔들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란이 해음의 귓가에다 무언가 속삭였고, 이를 들은 해음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초록을 보며 환히 웃음 지었다. 해음은 초록과 연결된 첫 번째 연과 두 번째 연을 곱씹어보았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어떠한 존재와 붉은 연을 잇게 해주는 건, 그 존재를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과 그에 따른 구원이라는 것을.

이제 그들에겐 초록을 위한 단 하나의 붉은 연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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