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계절] 빛(8)

by 지수

우진과 만난 지 이틀째 되는 날. 란은 계속해서 먹지도, 움직이지도 않은 채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해음은 그런 란의 곁을 말없이 지켰다.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고 느낄 수도 없을 만큼 괴로울 때, 누군가 옆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큰 힘이 될 수 있음을 이미 마음 깊이 알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밤 10시경. 초록이 다급히 해음과 란이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우진이에게 가봐야 할 것 같아.”

“갑자기 무슨 소리야?”

순간 해음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란이 미세하게 몸을 움직였다.

“우진이 집 안이 연기로 채워지고 있대.”

초록이 다소 잠긴 목소리로 나무의 말을 전해주었다. 해음은 짧게 숨을 삼켰다. 이후 서둘러 핸드폰을 집어 들어 119에 연락하였다.

‘더 이상 무너지면 안 돼, 우진아.’

해음은 두 주먹을 꼭 쥐고서 그대로 방문을 나섰다.

“란아. 같이 갈래?”

문턱을 넘어선 해음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란에게 물었다.

“…….”

란은 여전히 뒤돌아 누운 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해음과 초록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다음 갈급한 마음으로 우진의 집을 향해 뛰어갔다. 뒤이어 고요히 요동치는 란의 숨소리가 방안에 은은히 번져 갔다.



해음과 초록이 우진에게 달려가고 있을 무렵, 우진은 짙은 연기 속에서 엄마 곁에 누운 채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 꿈에서, 어느 여름날, 과거이자 미래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성인의 ‘나’는 어제와 오늘처럼 연하늘색 셔츠를 입고 교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발걸음을 멈춰 연노란색 투피스를 입은 여자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여자의 얼굴은 자신을 보고 화를 내고 울음을 터트렸던 여자아이와 닮아있었다. ‘나’는 먼저 그 여자에게 말을 걸고 미소 지었다. 우진은 알 수 없는 설렘 속에서 조용히 ‘나’를 따라 웃었다.

갑자기 꿈속 화면이 전환되며, 모래 위의 피 묻은 연노란색 꽃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꽃은 방금 전 마주했던 여자를 떠올리게 했다. 고개를 숙이자 오른쪽 손목에서 피를 흘리며 모래사장에 누워있는 ‘나’가 보였다. 그리고 그런 ‘나’의 곁에서 여자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주저앉아 있었다. 우진은 다시 ‘나’와 함께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을 느꼈다.

우진은 깊은 의문에 빠졌다.

‘이건 ‘나’의 경험이자 나의 경험이 아니다. 난 누구일까. 왜 죽음의 문턱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빠져, ‘나’와 모든 기억과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걸까…….’

이윽고 연기에 질식해갈 때쯤, ‘나’의 고통이 나의 것이 되고, ‘나’의 심장이 나의 것처럼 울리고 있었다.



번개탄을 이용해 함께 목숨을 끊으려던 우진과 우진의 어머니는 해송마을에서 가장 큰 병원의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신속한 구조로 다행히 두 사람 모두 직접적인 손상은 입지 않았다.

해음은 우진의 어머니 옆에, 초록은 우진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고 있었다. 잠시 뒤, 해쓱한 모습의 란이 반쯤 정신이 나간 듯한 모습으로 응급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란은 천천히 해음과 초록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우진과 우진의 어머니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란의 눈앞에서 끝을 맺지 못한 전생의 업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었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관계, 똑같은 운명…….

“여기 앉아.”

초록이 란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란은 서서히 몸을 아래로 내린 다음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의 마지막 그날처럼, 우진은 고요히 두 눈을 감은 채 어제의 연하늘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새 옷은 벌써 얼룩져 오랜 시간의 흔적이 묻어있는 것 같았다.

“음…”

우진이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작은 신음을 뱉어냈다. 란이 우진을 안심시키려는 듯 살포시 이불을 올려주었다. 그러다 문득 우진의 오른 손목에 새겨진 흉터를 발견하였다. 란은 진의 환생인 우진의 과거를 보기 위해 우진의 오른 손목을 붙잡았다. 란의 머릿속에 폭력과 무관심으로 그늘진 우진의 13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되풀이되는 독설, 푸르게 멍든 몸과 얼굴, 혼자 밥을 먹던 수많은 날들……. 지독하게 얽히고 반복되는 고통스러운 그의 생 앞에서, 란은 하늘에 계신 그분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에게 또다시 이런 짐을 안겨줄 수 있을까…….

한낱 산신인 란이 우진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그 짐을 조금이나마 함께 짊어지는 것뿐이었다. 그 짐을 안고 미래를 걸어야 할 우진이 지치지 않게, 가까이서든 멀리 서든.

‘이젠 내가 함께할게.’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우진에게, 란은 마음속으로 결심을 전했다. 순간, 우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