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르타주 작가인 마리앤(줄리엣 비노쉬)은 비정규직 최저시급 노동자의 현실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 청소부로 위장취업한다. 대형여객선에서 고된 청소를 하면서 크리스텔, 마릴루같은 친구를 만나 우정이 싹트는 동시에 잔인하고 황량한 노동환경에 질겁한다. 마음속에 피어나는 그들을 향한 연민과 연대의식은 과연 진실인가. 친구를 소설속 등장인물로 이용하는 그녀의 태도는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찬 것인가.
임마뉘엘 카레르 감독이 연출한 < 두 세계 사이에서>의 원작은 플로랑스 오브나의 "위스트리앙 부두"라는 소설이다. 예술과 낭만의 나라 프랑스의 열악한 노동현실과 신자유주의 시대가 만들어낸 계급의 실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 결국 사람을 빛나게 하는 건 돈과 여유라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서글픈 현실을 영화는 부인하지 않고 삼킨다. 그렇게 '두 세계' 사이에서 화해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그 기간, 6개월이라는 "체험 삶의 현장"이 과연 의미없는 시간이었을까. 그렇진 않다. 어떤 이는 그녀가 작가임을 알고 놀라며 응원했으니까. 하지만 마리안에게 마음을 주었던 크리스텔과 마릴루는 달랐다. 같은 부류인 줄 알았던 친구가 알고보니 다른 세계에 거하는 주민이었을 때의 허탈감, 배신감.
영화는 여러 측면에서의 유사한 만남을 떠올리게 했다. 선교사와 원주민, 농활, 위장취업과 의식화, 노동해방이라는 이상과 강남 좌파. 그리고 그 끝에 서 있는 위선과 배신감. 결코 같이 갈 수 없는 연민으로서의 바라봄.
못난 놈들은 얼굴만 봐도 즐겁다는 속담이 있듯이 수준이 비슷해야 맘이 편하다. 그건 단지 경제적인 면 뿐 아니라 지적, 문화적, 정치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세계를 넘나드는 일은 할 수도 없고 함부로 해서도 안될 일이다. 욕망에 모터를 달아 상류층으로 간신히 진입해도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이 있고, 모든 걸 내려놓고 노숙자와 함께 해도 결코 같아질 수 없는 단계가 있다.
하지만, 180일간의 그 활동속에 담겨진 선의가 과연 위선으로 폐기되어야 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보았다. 삶의 진정성은 각자의 처한 위치에서 해야할 일을 성실히 감당하는 것이니까. 르포 작가로서 몸을 던져 체험하고 노동한 건 사실이니까. 그러니 아예 타인에 무관심한 사람들이여, 이런 이들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당신에겐 없소이다.
단지 맘에 걸리는 건 취재윤리였다. 애초부터 신분을 밝혔으면 어땠을까. 물론 그랬다면 청소할 자격도 주어지지 않았겠지만.
영화의 마지막은 배 떠난 항구처럼 쓸쓸했다. 청소부 친구들은 또 다시 여객선 객실의 침대시트를 갈고 화장실의 똥을 닦아야 하니까. 그런 점에서 <빌리 엘리어트>에서 아들을 공부시키러 런던으로 보낸 아빠와 형이 탄광으로 내려가던 장면과 오버랩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