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리스 게임>의 배짱
영화는 올림픽 여성모글스키 미국대표 예선전으로 시작된다. 몰리(제시카 차스테인)의 독백은 “스포츠 경기 중 최악의 사건은?”이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시작한다. 월드시리즈에서 4번 연달아지는 거? 월드컵 축구 예선탈락? 축구에서 브라질에게 패한 아르헨티나? 올림픽 4위? 올림픽에서 4등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하지만 몰리의 경우는 거기에 대한 반박을 한다. 몰리는 전미 랭킹 3위였고, 솔트레이크 시티 올림픽 예선전을 치르는 중이다. 랭킹 1,2위 모두 실수를 해서 점수가 낮은 상태다. 몰리는 자신의 미래를 그려본다. 오늘만 잘 통과하면 유타에서 열리는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고 계획했던 로스쿨로 진학한다. 하버드 로스쿨 입학 평균점수보다 높은 점수를 이미 확보한 상태다. 그런데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법. 마지막 공중회전 직전에 소나무 가지에 스키 탈착 버튼이 부딪혀 왼쪽 스키가 빠지고 몰리는 그대로 추락한다.
실제 인물인 몰리 브룸의 자전적 소설을 배경으로 한 몰리스 게임(2017)은 최고의 이야기꾼 아론 소킨이 각본과 감독을 맡은 작품답게 대사가 속사포처럼 빠르고 분량이 엄청나다. 자막을 제대로 읽지 않으면 금세 지나가 버리기에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그럼에도 영화 초반부터 관객을 집중시키는 기술은 정말 뛰어나다. 어느새 몰리의 상황에 깊숙이 몰입되어 그녀의 행동과 결정에 그대로 빠져버리니 말이다. 게다가 제시카 타스테인의 연기력은 할리우드 원탑이다. 특히 대사를 정확하게 발음하면서 긴장감을 증폭시키는 역할에서 제시카 만한 배우가 없는 듯하다.
사실 모글스키는 몰리의 꿈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하드 트레이닝으로 밀어붙인 그의 아버지(케빈 코스트너)의 꿈이었다. 아버지는 학업과 운동 양날의 검을 장착해야 성공한 인생이라고 봤다. 미국에선 스포츠의 위력이 대단해서 공부만 잘하는 건 반쪽인생으로 보기도 한다. 그래서 중고생 때 수영과 테니스, 농구, 축구 등을 잘해야만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다. 콜로라도에서 자란 몰리는 록키산의 스키장에서 매주 훈련했고, 12살 때 척추 대수술을 한 후 모글 스키만은 피하라는 의사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연습을 계속했다. 스무 살이 되어 인생이 멋지게 활강해야 할 순간에 그렇게 무너진 후 몰리는 엇나가기 시작한다.
우연히 시작했던 불법 포커장의 알바로 그녀는 돈을 벌기 시작한다. 그런데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알만한 셀럽 들이다. 영화배우, 사업가 등이 벌이는 판돈 천만 원짜리 포커가 열리는 날, 그녀는 팁으로만 몇백만 원을 챙긴다. 그런데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몰리는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을 임대해서 직접 포커장을 운영한다. 그리고 비밀스러운 인맥을 활용, 부자들을 불러들이고 하룻밤에 수십억 원이 베팅되는 최고급 포커판을 연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러시아 마피아들이 연계되면서 FBI가 냄새를 맡는다. 그녀 또한 마피아들의 손에 죽을 고비를 넘긴다. 결국 더 이상 도박장을 열지 못하게 되면서 그녀는 자신의 비밀스러운 도박장 스토리를 책으로 발간한다. “몰리스 게임”은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고 팬 사인회를 여는 등 돈방석에 오르려 하는데 갑자기 심야에 찾아든 FBI에 의해 그녀는 모든 재산이 몰수되는 동시에 법정에 출두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한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를 돕게 된 베테랑 변호사(이드리스 엘바, 호연)는 그녀를 위한 최선의 길을 찾아주기 위해 검사들과 엄청난 기싸움을 벌이고 그녀의 모든 재산을 되찾아주면서 형량을 최소화할 길을 마련하는데...
이 영화는 몰리를 둘러싼 몇몇 관계의 대립구도에 주목하며 이야기를 펼쳐간다. 처음에는 씨도 안 먹히는 변호사를 몰리가 설득하는 과정이다. 여기서는 숨 가쁘고 빠른 대사가 오가며 주로 몰리가 결백을 주장하는 내용이 담긴다. 다음은 도박장의 손님들과 몰리와의 기싸움이다. 법테두리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몰리는 그녀에게 껄떡대는 손님들과 거리를 두려고 애쓴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약물을 복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마지막은 몰리와 아버지와의 관계였다. 이 대목은 몰리가 자기도 모르게 왜 그런 도박에 빠지게 되었는지의 단서를 찾아주는 과정이다. 더구나 아버지는 심리치료 전문 교수다. 딸과 연을 끊었던 아버지는 그녀의 자서전을 읽고 나서 뒤늦게 딸을 찾아온다. 이 짧은 대목이 가장 감동적이었다.
아빠 : 네 책을 읽었다. 삼 년짜리 심리치료를 삼분에 해결해 주마.
(중략)
딸 : 왜 자식을 편애하셨나요.
아빠 : 그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 내가 비겁했다. 난 나를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딸아, 아버지의 사랑은 우주 같은 거란다. 네가 어떤 놈들에게 맞았다는 이야기를 읽고 난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찾아서 그놈들에게 복수하련다.
딸 : 그들은 마피아예요.
아빠 : 마피아면 어떠냐. 가만두지 않겠어. 너를 때리다니..(흑흑) 미안하다.
아론 소킨의 각본은 마치 피피티를 보는 듯 상세하다. 예를 들면 포커 장면에서 화면에 타짜들이 가진 카드를 띄우고 어떤 카드가 오면 이길 수 있다는 등 세심한 해설이 곁들여진다. 초반 스키부츠에서 스키가 빠져나간 이유에 대해서도 나뭇가지에 부딪히는 충돌의 물리적 설명까지 재밌게 설명한다. 마지막 법정공방까지도 이 영화는 끝을 모르게 달려간다. 그리고 인생 초대박 횡재 같은 것도 별로 관심이 없다. 다만, 몰리가 12년간 어긋나게 살았던(쉽게 말해서 *랄 했던) 인생의 궤적을 돌아보며, 가족이 화해하고 그녀가 참된 자신을 찾는 시점에서 막을 내린다.
스포츠 경기인가 싶다가 고액의 포커판으로 이동하더니 막판에는 격렬한 법리적 다툼까지 바라보는 관객은 인생이라는 것이 그다지 드라마틱하지 않아도 된다는 위안을 얻는다. 아니 처절한 실패를 해도, 바닥을 쳐도, 가장 중요한 게 뭐라는 것만 알면 인생은 두려운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몰리처럼 큰 일탈을 경험하는 건 권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생에는 *랄 총량의 법칙이란 게 있단다. 너무 자신을 억누르고 범생으로 살아가다가는 막판에 크게 사고 친다. *랄도 조금씩 풀어가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몰리의 대사는 그래서 감동적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제 서른다섯, 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쉽게 굴복되지 않는 사람이란 걸 알았다. 윈스턴 처칠은 성공이란 열정을 잃지 않고 실패를 거듭하는 능력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