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문 Oct 24. 2023

내 마음의 컨트리로드

<귀를 기울이면>



도서관 책에 바코드가 붙기 이전에는 도서대출카드란 게 있었다. 그 내역을 보면 내가 책을 빌리기 전에 같은 책을 빌렸던 사람들의 이름이 나온다. 중3 책벌레 소녀인 시즈쿠는 자기가 빌린 책마다 똑같은 이름이 있는 게 신기했다. 그 이름은 아마사와 세이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궁금증이 증폭된 것은 새로운 책을 빌렸을 때 맨 앞 장에 "아마사와 기증"이라는 글씨를 읽었을 때였다. 



시즈쿠가 사는 작은 아파트엔 도서관 사서인 아버지, 교사인 엄마와 대학생 언니가 함께 살아간다. 저녁에도 각자 자신들의 일을 하는 바쁜 가족들은 굉장히 부지런하다. 반면, 시즈쿠는 적당히 게으르고 적당히 오지랖을 펼치는 덜렁이 캐릭터. 절친 유코는 짝사랑하는 남자친구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시즈쿠에게 상담하고 시즈쿠는 거침없이 조언을 해준다. 하지만 얼마 후 우연히 알게 된 골동품상의 할아버지와 그 손자를 알게 되면서 생의 최초로 가슴 떨리는 감정을 경험한다.


시즈쿠와 유코, 유코는 빨간 머리 앤의 캐릭터를 가져왔다고 한다.


지브리 스튜디오가 만든 감성멜로 <귀를 기울이면>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수제자인 콘도 요시후미 감독의 첫 작품이자 유작이다. 1998년 47세로 세상을 떠난 콘도 감독은 <빨간 머리 앤> 등 소녀들의 감성을 잘 표현한 것으로 유명했다. 이 영화는 사춘기 소녀가 맞닥뜨린 첫사랑의 이야기이자 인생의 새벽녘에 선 젊은이들을 위한 응원가에 다름 아니다. 


영화는 낯익은 멜로디의 팝음악으로 시작한다. 7080 세대에겐 영원한 아이돌인 올리비아 뉴튼존, 그녀가 부르는 Take me home country road가 흘러나올 때 나는 저절로 이 영화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컨츄리 송과 포크, 디스코를 누볐던 올리비아 뉴튼 존. 그녀의 노래 중 'Physical'이란 노래가 유명했는데 한때 우리는 영어발음이 어려워 'Let me hear your body talk'을 '냄비 위에 밥이타'로 불렀었다. 또 'If not for you'란 노래는 '기분 나빠요~'로 부르기도 했다(이밖에도 여러 개가 있다. 에릭 카멘의 'All by myself'를 '오빠만세~' 등등). 


영화에서 시즈쿠는 합창단이 부를 Take me home country road의 가사를 번역한다. 그런데 최초 버전은 들리는 대로 막 만들었다. "콘크리트 로드, 언제까지나~ 나무를 베고 계곡을 메워~ 웨스트 도쿄 마운틴 타마~ 나의 고향은, 콘크리트 로드" 그런데 하필 이 개사한 악보를 어떤 남학생이 주워 보고 있다는 거 아닌가. 그렇게 맺어진 창피한 인연은 그 뒤로도 계속된다. 








어느 날 전철 속에서 만난 고양이를 따라 '아틀리에 지구옥(地球屋)이라는 골동품 가게에 도착하는데, 거기서 인자한 할아버지를 만나 멋진 작품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그리고 동화 같은 그곳에서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신비로움을 느낀다. 멋진 벽시계에서는 인형들이 드나들고 고양이 인형의 눈은 살아있는 것처럼 반짝였다. 




훔베르트 폰 지킹겐 남작


이 날 이후로 시즈쿠의 삶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늘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과는 달리 삶이 신비한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을 가지게 하는 골동품 가게는 시즈쿠에게 새로운 비밀의 문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앞에서 자기를 놀리던 남학생과 마주친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할아버지의 손자였고, 더 놀라운 건 바로 그 운명의 도서대출남, 아마사와 세이지였다. 이럴 수가... 어디 숨을 데 없나...




그런데 이 세이지라는 친구, 꿈이 바이올린을 제작하는 거란다. 그래서 이탈리아로 유학 가서 일을 배우고 싶단다. 헐, 세이지, 이 녀석, 겨우 중3이 인생에 계획이 있구나.  연주도 잘하냐고 묻자, 네가 아는 노래를 연주하겠다며 "콘크리트 로드... 어디까지나..."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업데이트된 가사로 노래를 부르는 시즈쿠. 


"컨트리 로드, 이 길을 계속 따라가면 고향에 닿을 듯한 생각이 드는 컨트리 로드...."



잠시 후 할아버지와 그 친구들까지 가세해서 오케스트라가 벌어진다. 행복감에 젖은 시즈쿠는 저절로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아,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다면 정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이날부터 시즈쿠의 깊은 고민이 시작된다. 꿈이 없었던 시즈쿠에게 세이지가 건넨 말, "넌 글 솜씨가 좋으니 글을 써봐"라는 말이 시즈쿠의 인생을 통째로 흔들었다. 


엄친아 세이지와는 꿈의 수준이 다르다는 초라함이 느껴지는 시즈쿠. 같은 나이임에도 인생의 꿈과 계획을 가진 세이지를 보며 존경심과 넘사벽이 동시에 느껴졌다. 급기야 늘 상담만 해주던 유코를 찾아가 인생상담을 청한다. 결국 글쓰기를 해보겠다고 결심하는 시즈쿠. '고양이 남작인형'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써 나가기 시작한다. 소설의 제목은 '귀를 기울이면'. 3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글쓰기에 매진하는 시즈쿠. 성적은 100등이 떨어지고 집에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지만 시즈쿠는 용기 있게 부모님께 말한다. "지금 제 인생에서 공부보다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3주가 지나 약속대로 가장 먼저 할아버지를 찾아가 글을 보여드린다. 천천히 보시겠다는 할아버지에게 절박한 목소리로 "지금 바로 읽어주세요. 그리고 평가해 주세요. 오늘 꼭 듣고 싶어요" 


할아버지는 글을 읽고 이야기해 주신다. "참 좋구나. 좀 거칠고 덜 다듬어졌는데 그게 더 좋은 거란다." 그제야 시즈쿠는 울며 말한다. "의욕만으론 안 되겠어요. 더 많이 공부해야겠어요. 너무 두려웠어요." 할아버지는 조용히 시즈쿠에게 돌하나를 선물로 주신다. 운모와 편암으로 구성된 녹주석,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었다. "이제 시작일 뿐이야. 네 인생이야기를 멋지게 써 보렴." 그리고 허기진 소녀에게 맛난 가락국수를 끓여주신다. "세이지 녀석이 첫 바이올린을 만들었을 때는 라면 곱빼기를 끓여줬는데..."



영화는 두 달간 이탈리아에 다녀온 세이지가 시즈쿠를 찾아와 고백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그런데 단순히 달달한 고백이 아니었다. 자신의 꿈을 향한 열정을 시즈쿠에게 보여주며 너의 꿈도 이루기를 바란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한 친구는 악기를 만들러 떠나고 한 친구는 글쓰기를 위해 더 공부하기로 약속한다.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해가 뜨기 시작했다. 여명은 젊음처럼 점점 밝아왔다. 젊음은 인생의 새벽녘이다.  어두컴컴한 새벽은 낯설고 인생의 큰 그림은 희미하다. 하지만 서서히 해가 뜨는 젊음은 가능성이다. 그렇게 산을 올라가기 시작하면 점차 산 아래의 풍광이 보이기 시작한다.  산을 오르는 동안 수많은 인생의 멘토들을 만나게 된다. 할아버지 같은 멘토로 인해 용기를 얻는다. 세이지라는 친구를 통해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유코라는 친구를 통해 마음을 나눈다. 또 앞으로 시즈쿠가 만나게 될 미지의 멘토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한번 꿈꿔볼 만하지 않은가. 작은 꿈들이 하나씩 실현되어 가면서 벌어지는 다이내믹한 이야기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삶이 아닐는지. 귀를 기울이면 내 마음속의 속삭임이 들릴 것이다. 그 속삭임을 따라 조용히 걸어가 보자.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콘크리트 로드가 아닌 내 마음속 컨트리 로드로....




매거진의 이전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