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문 Oct 08. 2023

블랙코미디란 이런 것이다

<슬픔의 삼각형>의 비관주의



주인공 칼과 야야는 연인관계이자 모델이다. 남성모델은 여성모델에 비해 수입이 1/3밖에 되지 않는다. 둘 사이엔 그래서 부인할 수 없는 위계가 있다. 인플루언서인 야야를 위해 칼은 사진을 찍어주고 대신 그녀에게 주어지는 크루즈 무료체험에 올라탄다. 하지만 배가 난파되면서 섬에 고립되고 생존자 8명 사이에서는 생존력에 의해 위계질서가 새롭게 조정된다. 



크루즈가 난파되기 전, 승객들은 재력에 의해 계급이 매겨졌다. 선장도 하수인에 불과했고, 러시아에서 똥을 팔아 거부가 된 비료회사 대표가 크루즈를 쥐락펴략했다. 선장과의 기싸움에서도 결국 선장(우디 해럴슨)이 밀린다.  화장실 청소부인 아비가일(돌리 드 레옹)은 고립된 섬에서 불을 피우고 물고기를 손으로 잡는 능력으로 권력을 쟁취한다. 그 후에 벌어지는 독재는 그녀가 경험했던 계급적 모순의 도돌이표에 지나지 않았으니.



스웨덴의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이 연출하여 작년 칸의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슬픔의 삼각형>은 현대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통렬하게 은유하는 블랙 코미디다. 처음 남자모델 워킹을 지시하던 심사위원이 칼에게 한 말 "미간을 찌푸리지 말고 걸어. 슬픔의 삼각형이 생기니까."에서 제목이 차용되었다. 하지만 삼각형은 단순히 미간의 주름만이 아닌 현대사의 비극과도 연계된다. 


극의 대부분은 비유로 설정된 크루즈나 외딴섬과 같은 특정 장소에서 진행되는데 이는 마치 연극의 무대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핵심적 주제는 오히려 선장과 졸부와의 대화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미국에 사는 사회주의자 선장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는 반면, 러시아의 졸부는 미국 자본주의의 표상인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신봉한다. 결국 이념이나 진영 안에 인간은 갇히지 않는다는 것을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넌지시 제시한다. 동시에 선장의 어머니가 슬피 우셨다고 하는 사건,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말콤 엑스, 그리고 케네디 대통령 형제들이 암살된 사건을 '슬픔의 삼각형'에 비유하며 세 사람의 죽음을 불러온 것은 전쟁으로 부를 창출하려는 미국의 야심에 의한 것이라고 도발한다. 이런 직접적인 내레이션은 사실 영화에서 도입하기엔 생뚱맞고 불편한데 감독은 절묘하게 배를 흔들어 관객의 혼을 뺀 상태에서 주입식으로 전파한다. 


이어지는 섬에서의 에피소드는 그야말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한다. 프레첼 한 봉지에 존엄이 왔다 갔다 하고 생선 한 조각에 비루해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들의 모습을 유머러스하게 그렸다. 섬에서의 전복된 질서가 평화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한 것은 다음의 대사 때문이었다.


"각자의 능력에 맞게 일하고 각자의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


하지만 관객들의 호주머니까지 털털 털어버리려는 심산으로 거의 막장까지 내달리는 이 감독의 집요함은 결국 공동체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의 한계와 비뚤어진 위선을 정확히 지적한다. 거기에는 인종도 성별도 없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코미디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비관적이다. 마지막까지 마음을 졸이지만 결국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오~ 신이시여, 이를 어찌하오리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