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혼자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했다. 재키는 나가서 들어오지 않았다. 한창 나이대 친구들과 어울리는게 좋을 때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매우 필요한 때라는 걸 알고 있다. 나도 나만의 친구와 어울리는 걸 즐기고 그게 매우 필요한 때이다. 다른 점이라면 그 친구는 나를 떠나지도 않고, 다른 이의 친구가 되지도 않는다. 그저 내가 필요할 때가 되면 나와 함께 해준다. 고통이던, 행복이던, 그곳이 어디건.
템피니스 근처의 카페에서 잠깐 돌아다녔다. 카페에 앉아서 유튜브만 보고 있자니 내가 한국에 있는건지, 싱가폴에 있는건지 알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분이 좀 별로 좋지 않았다. 왠지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 내가 싱가폴에 온 가치가 없는 것 처럼 느껴져 짐을 싸들고 나왔다. 템피니스 어딘가에 데카트론이 있었는데... 19일이 첫 출근, 아니 첫 교육이니 일주일 정도의 날짜가 남아있었다. 그저 매일 카페에만 가기엔 너무 아까운 시간이 아닐까. 순간 웃겼다. 한국이라면 매일 똑같이 카페에 가고, 탁구를 치러가고, 끝나면 피시방을 전전하는 비슷한 날들이었을텐데, 여기서의 하루는 너무 아깝게 느껴진다는게 웃겼다. 그래서 그 아까운 시간에 하나라도 더 눈에 넣고자 그 뜨겁고, 습한 싱가포르의 길을 계속 걸었었나. 내가 하루에 걸어도 20분 이상을 걷질 않았는데, 여기서는 기본 2시간을 걸었다. 덕분에 집에 돌아와서는 발바닥과 허벅지에 피로가 쌓여서 내일은 마사지를 받으러 가야 하나 하고 생각도 했었다.
그래서 남은 기간 동안에 더 싱가포르를 돌아볼까 하다가 자전거가 생각이 났다. 중고가 100 싱달러로 올라온 매물도 보았겠다, 동네를 돌아다니기에도 좋지 않을까. 하지만 막상 사려고 하니 뭔가 덜컥 마음 속에 걸렸다. 사고나서 타이어가 터지는걸 대비해 정비 도구도 필요하고, 체인관리는? 헬멧도 사야 하나? 얼굴이 많이 탈텐데 선크림도 사야하나. 자전거 하나에 짐이 캐리어로 하나가 더 늘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미 내 짐은 캐리어 두개에서 더 늘면 안된다. 지금부터 사는 모든건 다 버려야 한다. 내가 여기, 이 파시리스 단칸방에, 남자 둘이 사는 방에 평생 산다고 하면 모를까, 이사를 간다고 하면 다 버려야 할 짐이 되버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나는 항상 나의 빈자리를 충동적인 구매로, 마음속으로는 합리적인 구매라고 설득하고 설득당하는 구매를 해오지 않았나 싶다. 수원의 방을 뺐을 때를 기억해봐라. 그 얼마나 많은 비싼 장비들이 겨우 만원, 5천원에 팔려나갔나. 그나마도 무료로 나눠줘버린 것도 너무 많았다. 그 돈만 잘 모았어도 좋았을 것이다. 나도 방금 자전거 구매를 포기하면서 얼마의 돈과 얼마의 폐기비용을 아꼈나. 아차하면 개고생을 할 뻔한걸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는 싱가포르에 왜 왔을까. 그렇게 좋아하던 복싱도, 매일의 안식처이던 탁구도 모두 버리고 왔다. 여기서는 취미가 중심이 아닌, 내 삶이 중심인 삶을 살고자 하지 않았나. 그 며칠 지났다고 나는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전 이민자 교육에서 강사가 우리에게 물었다.
'싱가포르는 매우 행복하고 안전한 나라입니다. 아마 미국보다 더 좋을지도 모르죠.'
'여기 당신들은 왜 왔나요?'
나는 왜 왔을까, 이 먼 싱가폴에. 그냥 내 잠자리에 계속 외국으로 가는 꿈을 꾸어서 온 것일까. 아니면 막연히 미국으로 가는 중간 루트라고 생각이 들어서? 여기만 잘 버티면 내가 진짜 대접받고 한국으로 금의환향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니면 그냥 좀 긴 여행을 즐기기 위해 온 것일까. 나는 그저 'For Experience' 라고만 답하고 말았다. 그게 진심이 아니란건 그 사람도, 나도 알텐데.
에이전트에서 나에게 좋은 기회를 주었다. 퇴사 후, 그날도 아무런 생각없이 탁구만 치고 돌아온 날, 물론 다른 에이전트와의 께림칙한 계약으로 향하고 있었으나, 그 일요일 오후, 급하게 써낸 영어 이력서를 보고 바로 연락을 주었다. '이 저녁에 무슨 모르는 번호로 전화야...' 그 전화 이후로 나는 곧장 한국 생활 정리에 들어갔다.
이것은 나에게 기회일까, 아니면 그저 시간낭비일까. 그 답은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여기온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고, 묵묵히 나의 길을 간다면. 앞으로 평생 그러진 못하더라도, 딱 일년동안만 수도승 처럼 나의 길을 걷는다면, 그 나머지 삶들도 내 생각대로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 생각대로 되는건 절대 없겠지만 그래도 내가 쑥쓰러워하진 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기에 복싱 선수가 되러 온 것도 아니고, 탁구 고수가 되러 온 것도 아니다.
'Global Standard' 모두가 다르고, 모두의 개성을 존중하지만 나는 정석, 정답, 그리고 모두가 인정하는 기준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기준은 나와 우리나라만의 기준이 아닌, 세상의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공감 할 수 있는 Global Standard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기준은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