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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자차 Feb 12. 2022

영화 듄 후기 (3)

3편. 장치

<장치>


영화엔 정말 매력적이고 신선한 소재들이 많이 나왔다. 가령 맨 처음에 소개할 ‘목소리’라던가 하는 것들 말이다. 기존의 SF 영화에서 많이 보던 뭐든지 자를 수 있는 레이저 광선 칼이라던가 염력이라던가 하는 초월적인 장치들이 아닌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어떤 의미를 가진 것들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쩌면 정말 외계인들은 지구인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고 인간이 가진 최대한의 잠재력을 잘 발휘한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니 왜, 사람 자체가 우주라는 말도 있잖아. 그렇다면 우리 지구인들도 가능성이 무한하잖아. 얘기가 딴 곳으로 새는데, 아무튼 요점은 이것이다.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볼 만한 잠재력이란 것을 소재로 사용했다는 점, 그래서 오히려 공상영화가 아닌 지극히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영화였다는 것을 말이다. 


-목소리

베네 게세리트가 능력을 고도로 발전시켜 만든 그들만의 최고 기술. 겉으로만 보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이 목소리를 들으며 다른 생각을 했다. 소설 속에 묘사된 목소리를 영화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정말 많은 고민과 시도가 필요했겠지. 그래서 이 목소리를 두고서도 이런저런 생각이 들 수 있는 것일 테다. 제시카는 아직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지 못하는 폴에게 ‘네 목소리는 어조가 강압적이야’라는 둥 어조의 높낮이를 조절하라고 말하지만, 그건 단순하게 그렇게 조절하는 것만으로 되는 것 같지는 않다. 영화에 표현된 목소리는 정말인지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나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듯한 고압적인 느낌도 들었고, 그것이 매우 합리적이면서도 이성적인 판단처럼 느껴지는 의미를 가진, 오차없는 직관적인 감정을 표현했다. 우리는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것도 내 판단에 옳다는 생각 고리가 만들어지면 수긍하는 편인 것 같은데, 이것과 목소리의 작용은 조금 다른 방식인 것 같다. 마치 아주 어린 시절,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모든 감각을 통해 해석하고 무의식적으로 판단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방식처럼. 아주 고대에는 그런 식으로 상황을 분석하지 않았을까. 베네 게세리트는 인간이 가진 기억 저편의 방식, 그 점을 이용한 것처럼 보인다.

이걸 현실에 적용한다면 어떨까. 영화를 보고 나와서도 모하임의 목소리는 정말인지 내게 강력하게 남아서 진지하게 아트레이데스도 좋지만 베네 게세리트의 일원으로 태어나는 것도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인지 강력해!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한들, 그것은 교육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고, 모든 인간은 본능적이고 감각적으로 발달한 시간 속에서 살아남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말로 우리가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 이렇게 살아왔을까. 정확도가 높은 직감은 이성보다 더 강력하지 않을까. 감정과 신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면 내 안의 잠재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베네 게세리트가 말한 그 목소리를 사용하는 능력의 비법은 바로 이것인 것 같다. 내가 나를 중심에 둘 수 있는 힘.

폴은 언제 자신의 목소리를 완벽하게 쓸 수 있게 될까.


-스파이스

스파이스는 우주 항해 시 가장 필요한 물질이기에 우주에서 가장 값비싼 물질이라고 나온다. 그 스파이스가 아라키스의 사막에서 채취할 수 있기에 필연적으로 아라키는 모든 것들에게 표적이 될 운명을 지닌 행성이었고, 당연하게도 그 행성 내부에서도 분열의 중심에 설 물질인 셈이다. 이 스파이스를 잘만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황제보다도 더 부자가 되겠지만, 안타깝게도 아라키스 사람들은 그러질 못했다.

아라키스에 물이 흐르고 식물이 자라나게 되면 풍부한 녹초지를 얻고, 자신들의 스파이스를 탐내는 탐욕스러운 자들과도 멀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만약 프레멘족이고 스파이스와 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무엇을 골라야 할까. 어떤 것이 우리의 삶에 이득이 될까. 어떤 것에 더 중요한 비중을 두고 가치를 둬야 할까. 변하지 않는 사실은 스파이스든 물이든 그것을 지키고 보호할 힘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겠다.

우리의 평범한 삶에도 이런 것이 있지 않을까. 그런데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칼은 나도 지키고 타인도 지킬 수 있는 도구지 않나. 그것을 어떻게 다루고, 통제하고, 어디로 향하느냐가 중요할 것 같다. 그 판단을 현명하게 해낼 수 있다면 스파이스는 그 어느 곳에도 속하고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물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삶을 두렵게 하는 존재지만 동시에 윤택하게도 만들어 줄 수 있는 존재. 우리의 스파이스는 무엇일까. 새삼 궁금해진다.

저게 다 스파이스라니!


-크리스나이프

프레멘은 샤이 훌루드인 모래벌레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였다. 그래서 그 먼 거리를 모래 벌레를 타고 이동한다던가, 자신들의 무기를 그 이빨로 만들지. 모래 벌레에게 죽는 것도 명예롭다고 생각하고, 그 이빨인 크리스나이프도 신성하게 여긴다. 마치 그 시대의 명예로운 훈장처럼 여겨지는 이 크리스나이프와 비슷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어느 책에서 본 것 같다. 유년기 시절의 행복한 추억은 평생 간다는 말. 그래서 어릴 적 환경이 중요하기에 양육자들은 이 시기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나도 과거를 생각할 때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는 기억들이 꽤 있었다. 물론 마냥 예쁘기만 한 기억이 있는 건 아니고 흑역사라고 부를만한 것들도 있지만, 그래도 지금의 나를 살아가게 하는 기반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슬픈 경험은 그것대로, 기쁜 경험도 그것대로 말이다. 마치 정호승의 산산조각이란 시처럼.

프레멘의 크리스나이프도 마냥 영광의 산물은 아닐 것이다. 샤이 훌루드라고 부르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프레멘들이 모래 벌레에게 죽임을 당했을까. 모래 벌레를 없애려 노력도 많이 했을 것이고, 실패와 좌절은 수도 없이 경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프레멘들은 그 사막에서 모래 벌레를 샤이 훌루드라 이름 붙이고 자신들과 함께 살아갈 것을 선택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해쳤던 샤이 훌루드의 이빨로 자신을 지키는 지점까지 갈 수 있던 것이 아닐까. 늘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샤이 훌루드. 그가 지나간 곳은 늘 처음으로 돌아간다.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흔적 없이 사라지더라도 우리는 그것대로 현명하게 잘 살아갈 수 있다고, 그걸 크리스나이프가 말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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