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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자차 Aug 01. 2023

영화 후기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8)

감상평 : 흘러가다 만난 사람

사진출처 : 네이버, 구글 "콜미바이유어네임"


첫사랑이 누구냐고 물으면 고개를 갸웃거리겠지만, 기억에 남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유난히도 눈에 들어와 박혀버려서 잊을 수 없는 사람들 말이다. 오늘은 그중 한 사람에 대해 말해보려고 한다. 마침 올리버도 파란 셔츠를 입고 있었고, 그때도 이 영화처럼 여름이었으니까.

     

오래전에 ‘바람의 나라’라는 게임을 하러 PC방에 가끔 들리곤 했었다. 싱거운 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 PC방을 나왔고, 바로 앞에 있는 미니스톱 편의점으로 향했다. 무더운 한여름이었고, 나오자마자 뜨겁고 습한 날씨에 인상을 잔뜩 구겼다. 곧바로 편의점을 향해 몇 걸음을 내디디었고, 급한 와중에도 창가에 아른거리는 누군가를 보았다.

     

나는 매대로 걸어가면서 고개를 돌려 의자에 대충 걸터앉은 누군가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그 사람의 뒷모습은 그냥 쳐다만 봐도 예뻤다. 마른 듯 늘씬하고 깔끔하면서도 매끄러운 태라서 무용하는 사람인가 싶기도 했다. 아니 실은 내가 좋아하는 태라서 좋게 봤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입고 있던 옷은 진한 푸른색의 카라가 있는 반팔 셔츠였다. 몸에 너무 크지도 딱 맞게 작지도 않았다. 파란 바탕 위에는 정확하진 않지만, 노란색 꽃들이 그려져 있었다. 아무튼, 그런 셔츠가 바람이 부니 마치 얇은 속 커튼이 바람에 움직이는 모양처럼 흔들렸다. 동시에 엷은 머리칼도 휘날렸다. 상대는 베이지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허벅지 절반이 드러나는 짧은 반바지였다. 바지가 헐렁한지 속에 넣은 셔츠가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나왔고, 결국은 반쪽이 흘러나와 찰랑거렸다. 그리곤 흰색 운동화 뒤축을 구겨 신고 느린 움직임으로 천천히 골목을 걸어갔다.

     

옷에서 시선을 내리자 하얀 목덜미와 상처 하나 없이 곧게 뻗은 하얀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운동이라곤 숨 쉬는 것밖에 하지 않은 것처럼 근육이라곤 없었고, 햇빛은 단 한 번도 받은 적 없다는 듯 새하얀 피부였다. 그래서 그런지 피부가 부드러워 보였고, 반짝거리며 윤기가 돌았다. 나는 이 부분에서 무용하는 사람은 아니구나 생각했다. 걸음걸이도 그랬고. 얼굴이 궁금하던 찰나에 남자가 뒤를 돌았는데 섬세하고 고운 선에 예민하고 까칠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그 일은 아주 찰나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너무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게 좀 이상하고 부담스러워서 그냥 흩어졌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는데, 오히려 물감이 묻은 붓을 깨끗한 물에 푼 것처럼, 온통 그 푸른 색깔이 내게 퍼져버렸다. 고개를 흔들면 흔들수록 푸르게 녹아드는 감각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파란색이 가장 좋다. 파란색은 내게 정말 안 어울리는 색깔인데도 나는 파란색이 제일 좋아져 버렸다. 그래서 길을 걷다가도 그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특히나 잘 어울리는 사람을 보면 그냥 눈길이 간다. 그 순간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여름으로 돌아간다.

     

우습게도 세상에 푸르른 건 참 많다. 여름이 되면 녹읍이 푸르르고, 가을이 되면 하늘이 푸르르다. 봄이 되면 따뜻한 기운으로 세상이 푸르고, 겨울이 되면 차갑게 내려앉은 추위로 사람이 푸르다. 주변만 돌아봐도 푸른 것은 넘친다. 제주도 앞바다는 아름답고 신비롭게 푸르고, 내가 쓰는 일기장도 푸른색이다. 이 영화의 포스터도 푸르고, 당장 비가 갠 날씨는 모두가 사랑하는 맑음이다. 이토록 세상은 온통 푸른색으로 가득한데 내 기억에 남는 푸른색은 이것들이 아니다. 잠시 내게 머물지언정 오래도록 머물면서 강렬한 기억을 남기진 못했다. 왜? 너무 흔해서? 자연스러운 거라서? 때가 되면 늘 그러니까?

     

엘리오에게 늘 일상적이고 평범했던 것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올리버를 중심으로 촘촘한 그물망을 만들었다. 바흐의 연주곡, 알피 오로비에의 차가운 물, 침실, 악보, 자전거, 휴일이나 크리스마스에만 오는 이탈리아의 별장, 아니 어쩌면 이 순간의 모든 것이 다 좋다는 것들도. 재밌지 않은가. 그냥 조금 신경이 쓰이는 사람이 나타난 것뿐이고, 그냥 좀 설렘을 주거나 울림을 느끼게 하는 사람을 만난 것뿐이다. 의미를 부여한 것은 나 자신이고, 내가 내 멋대로 휘청거린 것이다. 부정하고 싶지만, 일상을 뒤흔든 물결은 그가 아니라 나였다.

     

평범했던 나에게 다가온 상대방으로 인해 특별해진 일상이 로맨스의 기본 구조라면, 나는 현실은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평범했던 그를 내가 특별하게 인식함으로써 내 삶을 한층 더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이미 나의 삶을 다채롭게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고, 그에 딱 맞는 사람을 마침 만났기에 기꺼이 상대방을 손님으로 대한다는 뜻이다. 내가 상대방의 매력에 휘둘린 것이 아니라, 마치 겉으로는 그런 모양새를 취하고 있지만, 실상은 정반대인 셈이다. 내 생각엔 상대방을 특별하게 느끼는 감정의 원인은 바로 이런 원리를 통해 도달하는 것 같다.

     

영화의 엘리오를 제 3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도 그랬다. 엘리오는 이미 빛나는 날들을 사색하고 즐겁게 보내고 있었다. 내가 본 올리버는 분명 키가 크고 잘생긴 멋진 남자이지만, 엘리오가 느꼈던 것만큼 내 삶의 특별한 손님으로 초대하고 싶을 정도는 아니다. 나라면 앞선 그 파란 꽃무늬 셔츠를 초대했을 것이다. 혹은 붉은 코트의 남자라던가. 즉, 나도 엘리오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나의 삶에 영향을 줄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우리는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엘리오의 그날도 그랬을 것이다. 올리버가 하늘색 셔츠를 입고 나타났을 때부터 엘리오의 인생엔 점 하나가 찍힌 것이다. 엘리오는 이제 자신의 일상에 의미를 더해버린 올리버와의 추억이나 그 사람 자체를 사유하고 싶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고민했고, 도발했고, 감정이 널뛰었겠지. 결국 올리버와 같은 마음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엘리오는 귀엽고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자마자 그와 함께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필연적인 인과관계의 결말이다. 만남과 이별은 둥글며 언젠가 있을 이별을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아직 마음이 다 식기도 전에 정리되는 인연은 첫사랑은 미완성이라는 말에 맞게 아련하고 애틋하게 추락해버린다.

     

이별. 어떤 이유로 사람들은 이별할까. 나는 어떤 이유로 이별을 선택하는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말은 한 인간이 감당해야 할 것이 시작이나 끝 중 하나가 아닌 그 전체 과정이라는 뜻과 같다. 둘 모두를 담아낼 수 없다면 결국 깨져버릴 그릇처럼 된다는 것이겠지. 아름다움과 추악함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하고, 기쁨과 슬픔도 그와 다르지 않은 것은 당연하고 묘하고 낯설다. 살아가는 동안 평생 태양의 빛과 달밤의 그림자를 떠나보낼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인 것일까. 그래서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구체적인 경험에서 입체적인 숨으로 성장하고 늙어가는 것일까.

     

킨츠키. 깨진 도자기를 옻으로 채우고 그 위를 금과 은으로 장식해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기법이자 일본의 전통 공예법이다. 아끼는 도자기가 모습을 잃었을 때 그 모습을 되살리고자 인간의 손으로 돕는 방법인 것이다. 더 이상 가치가 없던 도자기는 그날의 행복과 깨진 아픔과 다시 만난 재회의 기쁨을 품고 두 번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신기하지. 마치 이것은 여느 평범한 사람의 삶과 닮아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모든 것들. 고통의 시간을 옻으로 칠해 기다리면 그 위에 새 살이 돋아 더 다채로운 경험을 쌓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름답지. 그리고 참으로 슬프지. 그럼 완벽하게 부서진 경우엔 별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엘리오는 점점 더 초조해진다. 그래서 올리버에게 입고 온 셔츠를 달라고 말하며 남겨진 체온이라도 품고자 한다. 그러나 엘리오는 이미 알고 있다. 셔츠는 오직 셔츠뿐이라는 것을. 그가 떠나면 빛바랜 필름 사진처럼 숨결이 사라진 물건이 돼버린다는 것을 말이다. 자신들의 사랑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사랑을 대신하지만, 손아귀에서 사라질 사랑이라는 것을 애써 외면한다. 그래서 여행이 끝나갈수록 사회와 타협해 살아왔던 올리버보다 너그러운 부모의 울타리에서 다양한 것을 경험한 엘리오의 반응이 더 걱정스러웠다. 이런 나의 성급한 걱정에 영화는 완벽하고도 현실적인 결말을 제시한다. 바로 펄먼교수와 엘리오의 대화에서 말이다.

     

펄먼 교수는 엘리오와 올리버가 서로 만남이 살면서 겪기 힘든 행운이며 소중한 순간이라고 말한다. 꾸밈이 필요가 없었고, 아름답게 포장할 이유도 없고, 바다 깊은 곳에서 발견된 소년의 동상처럼 내면에서 푸르고 맑은 영혼이 깨어났을 뿐이라고 말이다. 길고 긴 시간을 지나 연인을 향한 사랑이 예술에 무지했던 황제가 아닌 고고학자의 연구에서 빛을 봤듯, 상대방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감각은 먼 훗날 문득 꺼내 보아도 잊지 못할 성장의 순간을 선사할 것이라고. 그것이 우정의 형태이든 사랑의 형태이든 단지 필요한 조건은 그 푸른 바다에 흠뻑 빠져들 용기였고, 이제 그 뒤에 찾아오는 슬픔과 괴로움도 외면하지 말고 충분히 겪으라고. 사라진 빈자리에서 느껴지는 공허함을 그대로 두고 그저 바라보라고. 나중이라는 말은 필요하지 않다고.

     

정호승의 산산조각이라는 시에도 그런 비슷한 말이 나온다. 룸비니에서 사온 부처님이 깨져서 산산조각이 났는데, 부처님이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화자에게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져 주며 이렇게 말했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고,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이다. 요즘의 우리는 온전한 나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옻칠하고 금박을 붙이며 사는 것 같다. 가끔은 그런 옻칠도 해보지 않은 것을 더 대단하게 여기기도 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이미 태어난 순간부터 끊임없이 깨지는 순간을 경험해왔고, 부득이하게 맞이할 수밖에 없는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럼 부처님이 화자를 다독인 것처럼, 엘리오가 올리버의 전화를 받고 숨죽여 눈물을 흘렸던 것처럼 그때가 되면 산산조각을 얻었기에 슬퍼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그러니 우주의 파편 중 하나인 우리네 생명체가 삶을 살아가는 것은 다른 의미로 말하면 작은 우주를 경험하는 것인 셈이다. 모든 생명체는 단 한 번 주어지는 몸으로 탄생과 소멸과 그 사이의 과정을 겪는다. 주어진 육체는 존재하는 시간이라는 은하수 속의 별과 같고, 그 육체의 최초이자 최후의 경험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직업과 사람과 사건들은 내가 나를 탐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단서이지 않을까. 영화 속 펄먼 교수의 직업이 고고학자라는 것과 엘리오와 올리버의 우정과 사랑, 바다에서 발견된 오래된 동상은 내게 이렇게 얘기하는 것 같았다. 나 자신의 고고학자가 되어 주어진 시간에 충분히 물들어 탐구해야 한다고. 우리 속에 감춰진 진짜 영혼의 소리를 듣고 감상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런 걸 보면 내 기억에 남는 사람은 상대방이 아니라, 결국 또 다른 나인 것 같다. 내 앞으로 수많은 상대방이 나타났다가 영향을 주고 사라지지만, 결국 남는 건 내가 남기려고 했던 별이 된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흘러감에 만나는 모든 사람이 알고 보면 내게 영향을 주는 완벽한 타인이 아닌, 먼 훗날의 나를 돌아보던 내가 전하는 나의 또 다른 내 푸름일 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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