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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추천] 스윗 프랑세즈 Suite francais

푸른 장미

by 사자차

이럴 때 추천해요

-결말이 슬퍼야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면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사랑을 알고 싶다면

-국경을 뛰어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장미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2025년을 앞두고 있는 당신에게

-12월 3일이 생일인 당신에게



영화 정보

개요_ 드라마

개봉일_ 2015.12.03.

감독_ 사울 딥

음악_ 라엘 존스

주연_ 미셸 윌리엄스, 마티아스 쇼에나에츠,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 마고 로비



추천 이유_

2025년을 앞두고 추천하는 영화다. 내년이 되면 개봉한 지 10년이 되고, 오늘은 12월 3일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매우 추천이고 새드앤딩이다. 노래는 아프고 슬프다. 하지만 참 듣기 좋다.



https://youtu.be/EVyNlLx-338

출처 유튜브 스윗 프랑세즈OST, I am Free





출처 네이버 스윗 프랑세즈



내가 태어났을 때 엄마는 길에 피어난 붉은 장미꽃들을 보았다고 하셨다. 새빨간 장미가 길을 따라 화려하게 피어있었고 엄마는 그걸 보며 참 예쁘다고 느끼셨단다. 그 얘기를 듣고서 나는 전혀 예쁘게 생긴 아이가 아니었기에 꽃이라도 예뻐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나를 키우면서 내게 몇 가지 별명을 지어주셨는데 탱탱볼, 모래알, 장미, 쥐방울 따위가 있었다. 내가 제멋대로이긴 했다. 하지만 여기, 나보다 더 장미 같은 영화가 있다. 다만 이 영화는 푸른 장미 같다. 왜냐하면 보랏빛은 존재해도 푸른 빛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슬프게 끝나는 로맨스를 좋아한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결말은 둘 중 한 사람이 죽는 것이고, 다음은 이별하는 것이다. 취향이 좀 이상하지만, 그 어떤 결말보다 가장 강렬하고 서로 사랑했던 기억만 오롯이 간직할 수 있어서 좋아한다. 뭐든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없다고 생각해서 사실 ‘두 사람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았어요’는 좀 막연하다. 그 행복하게 살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고 노력하며 살아갈까를 생각하면 선뜻 그 사랑에 발을 담그기가 염려된다. 마치 악마가 나타나 나를 사랑하지 않겠느냐고 손짓하는 것 같다. 아마 내가 무책임하고 불성실해서, 좋은 것만 취하고 사랑하는 감정만 간직하고 싶은 이기적인 사람이라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사랑이 안 되는 것 같다.


영화는 루실의 시선으로 천천히 슬픔을 향했다. 그러는 와중에 화면 속 두 사람의 높은 긴장은 나까지 숨 막히게 했다. 마치 내가 루실이 된 듯이 브루노의 모든 것을 샅샅이 훔쳐봤다. 화면이 비춘 그의 모든 모습을 하나도 빼먹지 않고 말이다. 내 머릿속엔 온통 왜, 왜, 왜만 가득 찼다. 그의 푸른 눈동자와 거기에 담긴 무언의 말을 해석하려 했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성큼 걸어오는 발소리에 귀를 세우고, 설명하고 표현하려는 말의 숨겨진 진짜 의도를 찾으려 하고, 친절과 정중함으로 포장한 속내를 알려고 했다. 만약 내게 같은 상황 속 브루노가 찾아왔다면, 나는 나의 흔들림을 숨겼을 것이다. 처음 문 앞에서 인사했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겠지만, 오히려 대화하기는커녕 같은 공간에 있지도 않을 것이다. 나의 끌림이 무서워서 도망치고 숨고 무조건 덮어놓으려고 할 것이다. 덮어놓고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릴 것이다.


하지만 왜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랑의 시작이 아닌가? 처음 본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끌린 것은 사랑이 아닐 수 있다고 해도 상대방의 행동에 의문이 생기고 논리적인 이유를 찾으려는 것, 이해할 수 없는 오차를 해석하려는 것이 정말 경계심과 의심 때문일까? 적어도 그것은 내게 사랑의 시작이다. 그러니 브루노가 2층으로 올라가고 그날 밤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을 땐 인정해야 한다. 그 소리가 소음이 아닌 음악으로 귀에 들어왔다는 것은 이미 나도 브루노에게 끌렸다는 것을, 그가 작곡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두 사람은 사랑한다는 말을 언어가 아닌 음악으로 전했다. 음악으로 이해하는 것은 마치 예술의 전당에서 듣는 클래식 연주와 같은 걸까? 큰 홀에서 온몸을 향해 오는 음표와 진동이 음악의 사랑일까? 어떻게 같은 음악으로 같은 생각과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나라면 그런 감정이 들어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느낀 것과 상대가 느낀 것은 절대로 같을 수 없다. 그러니 그의 연주에 귀가 끌리면서도 절대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악보를 보기는커녕 할 줄 아는 건 음악을 외우는 것뿐이니 그의 마음이 담긴 음표들을 이해할 순 없었을 거다. 오히려 음악을 듣고 어떤 곡인지 궁금해하는 마음과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 마음이 독특했다. 그 곡이 아름답다니, 나는 너무 아프게 들렸다. 분명 전쟁 중에 망가진 자신의 모습이나 환경을 표현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대화를 오랜만에 해봤다는 말에도 따뜻하게 대해줘서 고맙다는 말에도 절대 사랑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나라면 브루노의 표현을 절대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언어가 아닌 다른 것으로 소통을 한다면 무엇이 있을까. 사실 언어도 내겐 완벽한 소통의 도구는 아닌 것 같다. 악보 대신 소설책을 건넸더라도 이해함에 시간이 필요했을 테다.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문학을 주었으니, 그나마 소설이라서 고맙긴 하다만, 나는 몇 번이고 그 책을 읽으며 해석하려고 애쓸 게 보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의 해석을 확신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대며 그 자리를 고백의 자리가 아닌 비평의 자리로 만들어버릴지도 모르겠다. 문학이 어려웠지만 그 문학을 자유롭게 해석하는 시간만은 좋아했기 때문에 대체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혼란스러우면서도 끝끝내 그 책을 건넨 저의와 그 책의 해석을 위해 그와 마주 앉았을 것이다. 차를 구해오고 와인을 구해와서 내게 질문하고 답하는 브루노를 아주 찬찬히 동시에 꼼꼼하게 살필 것이다. 만약 그가 낭독해달라고 한다면 기꺼이 낭독할 것이고, 나는 그가 낭독하는 책이 궁금해질 것이다.


그러니 브루노를 만나는 것도 그를 의심하는 것도 내겐 어려운 일이다. 나는 지금 그가 쓴 악보를 받고 좋아하기도 전에 악보를 볼 줄 몰라 이걸 연주해줄 연주자를 먼저 찾아야 할 판이다. 만약 용기를 내 브루노에게 연주해달라고 하면 뭐라고 할까? 내겐 책을 읽어주는 것과 연주를 해주는 것은 같은 것인데. 그 옅고 푸른 눈동자로 당황할까? 아니면 큰 키로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해줄까? 나에게 소감을 물으려나? 확실한 건 나는 그 음악을 외울 것이고 몇 번이고 곱씹으며 머리에 새길 것이다. 검은 콩나물이 그려진 종이를 들고 다니며 종종 쳐다볼 거고, 음악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물어볼 것이다. 아마 종일 음악을 떠올리고 길을 지나가다가도 비슷한 음률을 귀신같이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다시 마주 보고 질문하며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겠지. 나의 노력이 허무하지 않게 오래도록 기다려줬으면 좋겠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어느 날 찾아온 둘의 만남처럼 브루노나 루실을 만나게 된다면 나도 그들처럼 할 수 있을까? 사실 이미 나는 실패한 경험이 있다. 나는 꿈에서 본 사람을 늘 현실에서 만나는데, 그 사람처럼 준비 없이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눈을 마주친 적은 없었다. 내게 석 달의 시간이 있다면 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방식은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나 자신조차도 확신하기에 어려운 방법이다. 그러니 브루노와 루실처럼 언어가 아닌 방식으로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하다. 도저히 어떻게 하는 건진 잘 모르겠다만, 나처럼 하다간 정말 중요한 사람을 그저 준비 없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스스로 도망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내가 나의 방식대로 사랑을 바라보다 놓쳐버렸어도 브루노와 루실이 준 그 이상한 감각은 그 음악처럼 내게 남아 의문을 가지게 할 것이다. 대체 그날 밤 함께 춘 춤은 무엇이었는지, 그 음표는 왜 그렇게 새겨진 것인지 되돌이표를 앞세우며 파헤칠 것이다. 지나가는 독일군을 보면 브루노가 아닐까 궁금해하며 늘 악보를 품고 다닐지도 모른다. 내가 그 사람을 아직도 떠올리는 것처럼.


동네 사람들이 그랬듯, 비난받을 일임에도 둘의 사랑이 더 간절하고 애달픈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아마 그들이 지킨 예의나 품위 때문인 것 같다. 브루노는 무례한 신세를 지면서도 친절하고 정중했으며 상대에게 예의를 보이고 그녀의 품위에 해를 입히지 않았다.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위치임에도 끝까지 존중했고 조심스러웠다. 루실이 다가오고 그녀가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곳에서만 아낌없이 표현했다. 브루노의 이런 태도가 루실의 마음을 열고 오랫동안 남도록 했을 것이다. 이런 태도는 자칫하면 마음을 전달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도 조급함에 자신의 삿된 욕심을 앞세우지 않았다는 점, 이별을 예상하면서도 둘 다 거부하지 않고 삼키듯 받아들이며 상대에게 피해가 될 만한 극적인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점도 놀라웠다. 마지막에 자신을 도와주는 브루노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서가 아닌, 끝까지 루실이 준비될 때까지 자신의 자리에서 음악과 통행증을 건네준 브루노에 대한 배려이자 약속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브루노와 루실이 서로 사랑한 것을 알았다. 나는 또 늦게 사랑을 안 것이다.


나는 이 영화가 좋다. 나의 모습과 조금 비슷한 데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태 그 침묵을 지켜왔고 그 침묵으로 내 마음과 사랑을 지켰으니 이번에도 똑같이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대단한 사실을 알게 되거나 관계를 지키기 위한 침묵이 아니라 그게 너무 무거워서 입에서 떨어지지 못해서 하게 될 침묵이다. 사랑한다는 말도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도 절대로 말하지 못할 것이다. 사랑은 드러내고 말하면 손상되고 흠집이 나지만, 담아두면 보호하고 오래도록 지킬 수 있다. 브루노와 루실도 그래서 말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그게 어떤 사랑인지 잘 알아버려서 입에 올리기에 너무 무거워져서 차라리 입을 닫고 음악으로 전하기로 한 게 아닐까. 나는 그들의 사랑을 그렇게 이해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을 들으면 언제나 그때로 돌아간다는 것도 그것이 침묵으로 지킨 사랑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내 안엔 나만 담겨야 하는데 사랑을 삼켰으니 내가 아닌 그 사람도 담겼을 테고, 앞으로 사는 내내 무겁고 깨질까 두려워 품고만 살아야 할 것일 테니 이건 벌이나 다름없다.


내가 적국의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그 순간 인간의 감정을 느꼈다면 사랑했을 것 같다. 사랑이라고 명명하진 않았어도 참혹한 전쟁 중 새삼스레 깨달은 사람다운 것에 끌리지 않을 순 없다. 그 감정이 정말 소중해서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당황했을 것이다. 다만 브루노의 행동은 내게 끝없는 번민과 혼란과 여운을 줄 것이다. 그럼에도 나도 루실처럼 잊으려고 애쓸 것이고 음악을 들으면 다시 돌아갈 것이다.


대체 두 사람은 무엇을 해결하기 위해 모였을까. 전쟁으로 지친 마음을 위로하는 사랑이었을까, 늘 함께하면서도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는 사람의 안식처였을까, 아니면 전쟁이 끝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스윗 프랑세즈, 나에겐 잊을 수 없는 그 꿈이 그가 남긴 음악과 같다. 나도 그 꿈을 꾸면 언제나 그날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역시 다시 만나고 싶다. 만나게 되더라도 말하지 않겠지만 만나고 싶다. 잠을 자는 것은 그래서 즐거운 일이고 침묵하는 것은 그에 대한 약속이다. 하지만 내게도 참을 수 없을 때 전할 음악처럼 다른 언어가 생긴다면 조금 위로가 될 것 같다. 그럼 나의 푸른 장미도 피어날 수 있지 않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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